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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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40

2019.5
#봄내를 품다
춘천의 향토문화유산 5
남산면 창촌리 삼층석탑
폐사지에 홀로 남은 창촌리 삼층석탑


빈터의 미학 - 폐사지를 찾다


폐사지의 쓸쓸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 간 절터를 찾았다. 이미 시작된 사월의 햇살에 온기가 그득하다. 늦잠에서 깨어나는 수목들은 이제야 잎눈을 틔운다. 말이 절터지 그저 작은 돌들이 함부로 섞인 산골짜기의 거친 밭이었다. 흐트러진 자세로 이끼 낀 돌탑 하나가 밭 한가운데 서 있다.


절터의 숨결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지만 탑 주변에서 조각난 기와편이 발길에 차인다. 오롯이 탑 하나 있어 이곳이 절터였음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 석탑 앞에 마주 섰다. 보호받지 못하는 폐사지의 서러움을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어떤 이유로 절문이 닫혔는지 묻지 않았다.


분명 이 탑 주변에 부처를 안치했던 그럴듯한 전각들이 있었으리라. 한때는 고단한 중생들의 정신적 안식처였고 치열한 구도의 현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나간 시간의 아득함, 빈 절터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빠져든다.


비록 불자는 아니지만 목례를 하고 탑돌이를 하듯 돌아가며 자태를 살펴본다. 외모로 어림잡아 보니 천년 세월의 비바람을 견디어 온 형색이다. 풍우와 인재로 훼손되기는 했지만 탑의 모습을 지탱하고 있다. 홀로 빈터를 지키고 있는 석탑이 안쓰럽다. 골짜기를 오르내리는 바람과 벗하며 조금씩 몸을 허물고 있었다.


이러한 긴 세월의 흔적 앞에서 과거의 영화(榮華)나 미래를 떠올리는 건 사치일지도 모른다. 마른 바람 한 줄기가 흙먼지를 날리며 부질없다는 듯 지나친다.

남산면 창촌3리, 이곳을 자연부락 명으로는 둔일이라고 부른다. 한자로 두릉(杜陵)이라는 기록이 보이는 것은 밭배나무가 있던 언덕이었으리라. 또 골짜기 안에 탑이 있어 탑안골이라고도 한다. 두리봉으로 올라가는 골 짜기 마지막 농막이 있는 밭 가운데 절터가 위치한다.





현재의 모습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부처의 공덕이었을까, 돌이라는 단단한 광물의 특성 때문이었을까. 아니, 임의로 치웠을 때 다가올 보이지 않는 재앙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이끼 끼고 귀퉁이가 부서져 가는 돌탑이지만 영욕(榮辱)의 세월을 지켜 온 영혼이 느껴지기에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리라.


문화재란 허명으로 철책 안에서 장식물처럼 서 있 는 석탑보다 이 작은 탑이 가슴을 흔들며 긴 여운을 느껴지게 한다. 사찰에 대한 기록이 없어 지명(地名)을 차용해 창촌리 삼층석탑이라 불린다. 만든 형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 보인다.


2중 기단임에도 불구하고 겨우 2.5m 정도의 키를 가진 참한 탑이다. 2층과 3층은 모두 아래층 지붕돌과 위층 몸돌을 붙여서 같은 돌로 만들었다. 춘천의 모든 탑이 그러하듯 이 탑도 맨 윗부분을 장식하는 상륜 부재가 없어진 상태이다.


1층과 2층 사이에 엉뚱한 부재가 들어가 있어 안정감을 느낄 수 없는 데다 밭을 갈다 농기계에 부딪쳤는지 상대갑석이 한쪽으로 밀려나 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예전 밭주인이 쟁기질할 때마다 탑이 거치적거리자 탑을 허물어 밭가에 쌓아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 탑을 치우고 난 후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거푸 생겨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때 세워진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정확한 사연을 아는 사람은 이미 한 명도 없었다. 풀리지 않는 역사 속의 수수께끼 같은 사연을 간직한 석탑을 또다시 홀로 두고 하산하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 않다.

이렇듯 우리 관내에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무관심 속에 스러져 가는 내 고장 문화재에 애정과 관심의 눈길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글·사진 심창섭(본지 편집위원 · 전 춘천문인협회장)

춘천에서 나고 자랐다. 춘천시청에서 문화재 업무를 전담하다 2006년 정년퇴직 후 수필가 및 사진가로 활동 중이다.

사라져 가는 춘천의 풍경과 민속 문화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기록 중이다. 저서로 포토에세이 <때론 그리움이 그립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