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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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39

2019.4
#봄내를 품다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 28
의암호 버스 추락사고
‘마(魔)의 구간’에서 빚어진 버스 추락, 26명 목숨 앗아간 대형참사로 기록

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사회 변화가 이뤄진 격랑의 시기에 조용한 ‘봄의 고장’ 춘천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은 1970년부터 40여 년간 토박이 언론인으로 이 고장에서 일어난 사건과 변화를 지켜본 필자가

그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숨은 일화와 뒷이야기들을 전하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봄내골은 계곡이 깊고 길이 험하다. 이런 자연적인 여건 때문에 여느 곳보다 교통사고가 잦았다. 정비 불량, 운전 부주의에 환경적인 문제까지 보태져 안전 지수가 낮은 탓이다. 그래서 사고가 터졌다 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를 사고의 위험에 노출돼 있어 항시 불안하고 조심해야 했다.

벌써 47년 지난 반세기 전이다.

탈 없이 지나가기만을 고대하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지난 1972년 8월 1일 오전 9시 40분께였다. 춘천 시내에서 승객 37명을 태우고 등선폭포로 가던 마이크로버스(소형버스)가 고속으로 다니다 김유정문인비 남쪽 50m 지점의 굽잇길에서 25m 벼랑 아래 의암호로 추락했다.

다시 떠올리기조차 참혹한 이 사고로 한꺼번에 봄내골 승객 26명이 사망하고 1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총체적 부실이 가져온 예고된 사고였다. 의암호 뱃길의 비극을 가져온 중도 동력선 전복사고(봄내지 2017년 7월호 참조·32명 익사)와 함께 지금까지 봄내골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가운데 육상에서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인양된 사고 버스


더위 피하려 등선폭포 가던 행락객들 벼랑 아래 의암호로 추락


사고가 일어난 날은 기상청 기온 관측 이래 연일 최고 기록을 경신하는 폭염이 한껏 기승을 부리던 무더운 여름 아침이었다.

사고 버스는 오전 9시부터 시내 곳곳을 돌며 승객을 태웠다. 대부분 더위를 피하려고 등선폭포로 가족 나들이에 나선 행락객들이었다.


오전 9시 20분께 중앙시장 앞을 출발할 때부터 벌써 정원(26명)을 8명이나 초과했다. 다시 근화동 옛 버스 종합주차장에서 2명, 송암리에서 1명 등 모두 37명의 승객을 난간에까지 빼곡하게 태우고 목적지인 등선폭포로 달렸다.


지금처럼 에어백이나 안전벨트 착용과 같은 안전장치나 법규가 미비했던 시절이어서 사고위험 요소를 가득 싣고 떠난 상태였다.


약 20분을 달려 높은 산이 양쪽에서 의암호를 끼고 협곡을 이루고 있는 사고지점(신동면 의암리 김유정문인비 남쪽 50m 지점)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반대방향에서 달려오던 대형차량과 마주쳤다.

높은 협곡을 깎아서 뚫은 노폭 8m밖에 되지 않는 비좁은 굽잇길이어서 피할 곳조차 없었다.


결국 과속으로 달리던 사고 버스는 길 옆 가장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들어 놓은 난간 18개를 부수고 25m나 되는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급기야 수심 12m인 의암호로 추락하고 말았다. 눈 깜박할 사이에 갑자기 빚어진 사고는 곧바로 엄청난 참사로 이어졌다. 의암호 건너편 덕두원 쪽에서 주둔해 있던 육군 모부대 소속 장병들은 이 사고 광경을 낱낱이 목격했다. 구보로 한달음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 시체를 인양하고 중경상자들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구조작업을 도왔다.


또 물속에 잠긴 사고 버스에서 창문을 뚫고 떠오른 강원대생 승객(당시 20세)은 엉겁결에 어머니를 구해낸 후에도 피투성이가 된 채 승객 8명을 구출했다.

긴박하게 사고발생 1보(一報)를 받은 강원도경찰청과 춘천경찰서는 현장 출동과 즉시 인근 미제4유도탄 사령부에 지원을 요청, 5톤급 크레인과 병력을 동원해 3시간 만에 물속에 잠겼던 부서진 버스를 끌어올리는 등 처참한 사고수습에 나섰다.


크레인과 잠수부 등을 동원해 힘겹게 사고 차량과 시체를 모두 인양한 후에는 도립병원과 건너편 덕두원 호수변에 마련한 임시안치소에 유족과 조문객들이 몰려들어 밤새껏 통곡이 끊이지 않은 울음바다를 이뤘었다. 사고자 중에는 현장에서 취재를 하던 기자들의 동료기자 가족도 있어 모두가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 필자가 강원일보 기자 시절 작성한 의암호 버스 추락사고 기사. 22명에서 26명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의암호 버스 추락사고 현장에 운집한 인파 (1972.8.1.)



모골이 송연해지는 구간에서 일어난 대참사


사고 버스는 1년 전 충남에 있던 공업사가 월남전에서 폐품으로 들여온 엔진을 조립해 25인승 마이크로버스로 만든 것을 180만원에 할부로 들여온 것이었다.


소속 운수회사도 사고 2개월 전 차주들을 모아서 급조한 후 벽지노선을 운행했던 영세회사였다. 차주지입제(속칭 모찌꼬미·차주가 자기 차를 가지고 회사에 들어와 일을 하고 돈을 받는 방식)에 따른 부실회사로 책임보험에는 가입했으나 임의보험에는 가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사고 이후 유족들과의 보상 시비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참사가 일어난 지점은 구조적으로 사고위험이 만재돼 있어 운전자들 사이에 ‘마(魔)의 구간’으로 불렸다. 노폭이 워낙 좁고 급커브길이 많은데다 높은 협곡을 깎아서 닦은 굽잇길에 25m 높이의 까마득한 벼랑 아래는 수심이 깊은 의암호까지 버티고 있었다. 누구나 이곳을 지나려면 모골이 송연해지게 되는 아찔한 구간이었다. 그런데다 겨울철에는 하루 종일 응달이 져 빙판을 이루고 봄철 해빙기에는 깎아 지른 높은 산꼭대기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낙석위험까지 도사려 운전자들이 운행을 꺼리는 교통사고 다발지역으로 꼽혔다.


호수 쪽 길옆에는 높이 50㎝짜리 콘크리트 가드레일이 설치돼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철근을 넣지 않아 18개가 휴지조각처럼 힘없이 튕겨져 나갔다.

해마다 비슷한 장소에서 사고가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경찰이 각종 교통안전 표지판을 빼곡하게 설치해 놓았다. 심지어 수학여행 등 단체관광에 나서는 차량을 싸이카와 깨끗한 경찰의 상징이었던 백차가 에스코트를 해주었으나 이마저도 역부족이었다. 지형지세에 익숙하지 못한 채 서행구간을 과속으로 달리다 운전부주의로 빚어지는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의암호 마이크로버스 추락사고가 있은 지 4년 뒤인 1976년 2월 28일에는 춘천댐 상류인 화천군 화천면 하1리 병풍바위 앞에서 더 큰 사고가 일어났다. 운전사를 포함해 승객 32명이 타고 춘천을 떠나 화천으로 가던 여객버스가 수심 3.4m 벼랑 아래 호수로 미끄러져 들어가 차에 타고 있던 32명이 모두 익사(溺死)했다. 강원도의 댐과 호수 주변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가운데 지금까지 최대 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도내에서 운송업을 경영하는 업체들 가운데는 자금력이 취약하고 운송 장비가 허술한 곳이 많았다. 그래서 큰 교통사고를 일으킨 업체는 곧바로 문을 닫아야했었다. 오죽했으면 사람이나 물건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운수(運輸)업체를 가리켜 ‘하늘에 경영을 맡길 수밖에 없다’고 해서 ‘운수(運數)업체’라고 불렀을까….

태생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운수업체 경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 현재 사고지점은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안전은 물론 휴양까지 즐길 수 있다



숙한 시민의식과 사전 안전장치가 중요하다


인류가 자동차를 처음 만든 건 1880년이다. 그 후 시간이 지날수록 엄청난 속도로 급속히 발전을 거듭해왔다.

국내 운행 차량이 1985년 처음으로 100만대를 넘어선 후 불과 12년만인 1997년에는 무려 10배인 1,000만대를 넘어섰다. 가구당 1.5대를 보유하면서 대망의 ‘마이카 시대’도 열렸다. 사고를 숙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황도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복잡한 도로나 험한 산길도 많이 개선됐다. 그리고 그 길의 운행을 인공지능이나 기계가 대신하고 드론택시 운행을 상용할 수 있는 시대가 코앞으로 다가왔을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 그러나 월드컵 개최에 이어 성공적인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나라이면서도 아직까지 OECD(세계경제협력기구) 30개 국가 가운데 사고율이 높은 나라로 꼽힌다.


지난 10년간 교통사고로 10만명이 사망하고 300만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OECD의 통계는 인류의 편익에 따른 리스크(risk)가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여기서 스타인백의 말을 떠올려 본다.

그는 저서 <미국인론>에 ‘인생의 3분의 1을 줄서기에 소비한다’고 적었다.


과정을 무시하고 오로지 결과주의에만 매달려 “빨리! 빨리!”만 외쳐온 우리와는 전혀 딴판임을 읽게 된다.

요즘은 운수당국이나 경찰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교통문화도 차량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급속히 바뀌어 가고 있다.

최대 인명 피해를 일으킨 교통사고를 떠올려 보면서 성숙한 시민의식과 함께 사고예방을 위한 사 전 안전장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절감하게 된다.





<드리는 말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아직도 아픔을 겪고 계실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이러한 참사가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기사를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아울러 불의의 참사로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글 김길소(본지 편집위원·한국전래오락연구소장) 사진 강원일보

춘천 태생. 1970년 강원일보사에 입사해 편집국에서 강원도 전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취재했다.

편집국장, 논설주간, 상무, 전무이사를 지낸 후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위원과 부위원장으로 언론사와 피해자의 중재 역할을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