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금니에 충치가 생겨버렸다. 엄마가 나의 충치를 발견했을 때는 충치가 상당히 진행되어 이미 이가 아픈 상태였다. 치과에 가야 하는데 내가 살던 화천군 산양리에는 치과가 없었다. 여름방학 때 엄마는 치과 치료를 위해 나를 춘천에 보냈다. 내 나이 아홉 살 때의 일이다.
젊었던 엄마와 아빠는 교육열이 상당히 높은 사람들이었음에 분명하다. 나는 삼남매 중의 막내였다. 언니와는 아홉 살 차이, 그 아래 오빠와는 여섯 살 차이가 나는, 한참 어린 막내였다. 나의 부모님은 언니와 오빠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마자 ‘대도시 춘천’으로 유학을 보냈다. 아홉 살 막내 동생의 치과 치료 보호자와 보육을 맡은 사람은 춘천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열여덟 살 언니였다.
고등학생이었던 언니는 주로 방학 때만 산양리 집에 오는 ‘도시 학생’이었다. 한 번은 여름방학 때 언니가 친구 두어 명과 함께 화천에 놀러 왔다. 물놀이하러 나선 언니와 친구들을 따라 개울에 갔는데, 물놀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긴 청바지를 무릎까지 착착 접어서 걷어 올린 후 개울에 종아리만 담근 채 서로 물을 살짝 뿌리면서 놀았다. 화천에 사는 나와 내 친구들은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채 인정사정없이 물에 풍덩 빠지는데 말이다. 어린 나에게는 도시 사람들의 우아한 물놀이 광경으로 여겨졌다. 언니는 나이 차이로든 삶의 모습으로든 친근하다기보다 어른 같은 사람,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우리 엄마가 MBTI 검사를 받았다면 감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F보다 이성과 논리를 중시하는 T의 성향이 나왔을 것이다. 물론 내 짐작이다. 내가 살던 산양리에서 춘천에 오려면 시외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산양리에서 비포장 도로를 40분 정도 달려 화천읍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버스에서 내려 춘천행 시외버스를 찾아 탑승해야 한다. 예전 도로 사정으로는 화천읍에서 춘천까지 족히 한 시간 넘게 걸렸을 거다. 이 길고도 험난한 여정에, 엄마는 겨우 아홉 살 먹은 어린이를 혼자 보내는 사람이었다. 또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한 청소년에게 아홉 살 동생을 일주일씩 턱, 하니 맡기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언니는 아홉 살 막내 동생의 치과 치료와 일주일 보육을 전담하게 되었다. 언니를 따라갔던 치과는 시청 근처에 있던 ‘C치과’였다. 요즘 어린이들은 정기적으로 치과에 가서 검진과 치료를 받는다. 내가 어렸을 때 ‘치과’는 이가 아파야만 가는 곳이었다. C치과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 갔던 치과였다. 충치 치료가 어떤 것인지, 치과가 어떤 병원인지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그냥 갔다.

세상에나…. 치과 치료는 아홉 살 어린이가 만난 ‘삶의 큰 시련’이었다. 요즘 병원은 어린이 손님을 위해 여러 가지 배려를 잘 한다. 사탕을 주기도 하고 어른 손님보다는 더 다정하게 대하기도 한다. 당시의 치과는 어린이를 위한 배려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다짜고짜 입을 더 크게 벌리라고 계속 종용해서 당황스러웠고, 입안에서 작동되는 기계의 소리는 크고 무서웠다. 기계에서 나온 물이 입 안에 고여 목구멍으로 넘어갈 듯 꿀렁꿀렁하는데도 입을 헹굴 기회를 자주 주지도 않았다. 더구나 신경 치료는 찌리릿, 으악, 너무 아팠다. 그렇게 무섭고 아픈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치료가 끝나자마자 울었고 병원을 나와서도 계속 울었다. 언니는 우는 동생을 달래느라 인형을 하나 사줬다. 내 기억에 인형은 ‘골덴’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납작하고 넙데데한 아이보리색 얼굴에 하늘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인형을 받아 안고 당장 눈물은 좀 그쳤겠지만. 다음날 또 치과에 가야 했다. 병원에 안 간다고 떼도 썼던 것 같다. 울면서 병원에 갔다.
사실 그때 치과 트라우마가 생겼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멀리서 치과 냄새가 조금만 풍겨도 심장이 빨리 뛴다. 얼마 전에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7층이 치과이고 나는 5층에 볼일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약간의 치과 냄새가 스치듯 났는데, 순간 마음이 조금 불안해졌다. 이 증상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딱 그때다.
우는 동생을 데리고 치과에 다녀야 했던 언니는 여러 가지 약속을 남발했다. 울지 않고 치과 치료를 잘 받으면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 또 육림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여 주겠다, 이런 약속들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또 ‘어거지’로 치과 치료를 받고 언니는 나를 만둣집에 데려갔다. 시청 맞은편에 있던 ‘왕만두’라는 상호의 음식점이었다. 음식점에 들어가니 이어지는 좁은 계단이 있었고 나는 언니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젓가락을 앞에 놓고 기다리니 테이블에 둥근 찜기 2단이 놓였다. 찜기 안 하얀 면보 위에는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나는 통통한 만두들이 얌전히 누워 있었다.
시골에 살던 내가 먹어본 만두는 엄마가 집에서 만든 만두가 전부였다. 엄마 이외의 사람이 만든 만두를 처음 먹어본 날이었다. 음식점 만두는 엄마 만두보다 크기가 작았고 만두피가 더 얇고 보드라웠다. 내가 받은 충격은 따로 있었는데 만두와 함께 나온 단무지였다. 내가 아는 단무지는 노란색이었다. 모양은 동그랗거나 동그란 단면을 반으로 자른 반달 모양이었다. 왕만두 음식점의 단무지는 글쎄, 하얀색이었다. 모양은 동그랗지도 않고 기름하게 잘라진 직사각형이었다. 하얗고 네모진 단무지라니….

왕만두의 문화 충격 며칠 뒤, 드디어 언니를 따라 육림극장에 갔다. 내 생애 최초의 영화관 경험이었다. 극장 앞에 서서 고개를 쳐들어 보니 그림으로 그린 영화 포스터가 크게 걸려 있었다. 극장 밖 왼편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고 극장 안에 들어갔다. 어떤 아주머니가 표 검사를 하면서 작은 구멍을 뚫어주었다. 어린 내 눈에 육림극장 로비 공간은 특이했다. 단차가 복합적이었다. 매점, 표 검사를 하던 곳, 극장 출입구의 높이가 계단 중심으로 다소 제각각이었다. 넓다기보다는 복잡한 인상이었다. 극장에 들어가니 매우 어두웠다. 극장은 이렇게 깜깜한 곳이구나.
언니와 봤던 영화 제목에 대한 기억은 사실 선명하지 않다. 연도와 대략적인 내용으로 검색해 보니 ‘유령선(Death Ship, 1980)’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포 영화였다. 요즘은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기 쉽지만 당시는 미리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 또 요즘은 어린이를 위한 영화가 많고 동시에 여러 상영관에서 많은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지만 그때는 선택의 범위가 별로 없었다. 아무튼 언니와 함께 공포 영화를 보았다.
육림극장에서 본 ‘유령선’은 무서웠다. 특히 샤워하면서 샤워기를 틀었는데 핏물이 콸콸 쏟아져 나온 장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수영장 안의 물이 다 핏물로 변하는 장면은 아홉 살 어린이의 상상을 초월했다. 이 영화의 여파로 나는 지금도 샤워할 때 눈을 오랫동안 감고 있지는 않으려 노력한다. 내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샤워기에서 핏물이 쏟아질지도 모르니까.

언니와 영화를 보고 나오니 어두운 저녁이었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언니는 봉의초등학교 건너편에 살았다. 거기가 엄마의 언니인 이모댁이었고, 언니는 이모댁에서 살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육림극장에서 가까운 곳이니 걸어서 갔던 것 같다. 당시는 봉의초등학교 앞 큰길 건너편에 개천이 있었고 개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서 집에 가는 중이었다.
무엇에 발이 걸렸는지 내가 맥없이 넘어졌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려서 나는 잘 넘어졌다. 대학생이 되도록 ‘잘 넘어지는 사람’으로 살았다. 어렸을 때는 무릎이 멀쩡할 날이 없이 맨날 빨간 ‘아까징끼’를 발랐고, 하얀 타이즈는 죄다 무릎에 구멍이 난 걸 엄마가 ‘꼬매’ 주었다. 일어나니 손바닥과 바지 무릎이 다 진흙천지였다. 내가 넘어졌을 때 언니의 표정은 생각나지 않지만 열여덟 살 언니의 마음은 꽤나 난감했을 것 같다. 집에 데려가서 씻겨 주고 옷 갈아입히는 등의 일을, 언니가 다 해줬을 거다. 나는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아홉 살 나의 치과 치료기는 나에게는 춘천 여행기이기도 했고, 죄다 ‘처음’ 투성이인 문화 충격 종합 세트이기도 했다. 첫 치과 방문, 첫 만둣집 체험, 첫 육림극장 방문, 첫 공포 영화 관람.
그 일주일이 언니에게는 어떠했을까. 병원에 안 간다고 떼쓰고 우는 동생을 달래야 했고, 비 오는 길에 넘어진 동생을 일으켜야 했고, 아홉 살 동생 보호자로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동생을 돌봐야 했던 극한의 여름방학 체험 아니었을까. 언니에게 한 번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