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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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28

2026-09
#춘천은 지금
원도심 나들이
걸어서 원도심 속으로

걸어서 원도심 속으로


‘명동’이라는 말로 퉁쳐도 춘천 사람이라면 대충 어디쯤인지 알아듣는 이곳. 원도심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새 학기 교복을 맞추던 설렘, 친구를 기다리던 약속, 엄마 손을 잡고 시장을 걷던 풍경이 골목마다 켜켜이 쌓여 있다. 오래된 풍경에 새로운 공간이 더해진 춘천의 원도심, 추억을 따라 걸어봤다.

걸어서 원도심 속으로

시청을 등지고 요선동 골목으로 들어선다. 춘천에서 가장 오래된 상업거리 중 하나다. 도청과 시청을 곁에 두고 관공서와 은행, 상점이 모여들었던 거리답게 골목에는 그 시절의 흔적이 제법 많이 남아 있다. 평창이모집, 강릉집, 속초식당처럼 강원도 곳곳의 지명을 단 식당들이 모인 것도 재미있다. 한 골목에서 강원도를 한 바퀴 도는 셈이다.

이 동네에서 가장 먼저 발길을 붙잡은 것은 거창한 역사가 아니라 오래된 목욕탕 간판이었다. 춘천목욕탕.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다니던 곳이다. 대형 사우나가 하나둘 생기는 동안에도 이 작은 목욕탕은 자리를 지켰다. 20여 년 동안 이곳에 계셨던 세신사 이모는 최근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골목에는 현대와 예원, 두 표구사가 남아 있다.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을 족자로 만들어 교내 전시회에 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림을 들고 표구사를 찾아가는 일까지가 미술 숙제의 마지막 과정처럼 여겨졌던 때다. 이제는 보기 드문 풍경이 됐지만 두 가게의 문은 오늘도 열려 있다.


요선동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오면 또 다른 기억이 이어진다. 지금처럼 대형 브랜드의 기성 교복을 사 입기 전, 중앙로 일대에는 교복사가 여럿 있었다. 새 학기를 앞둔 학생들이 몸에 맞춰 교복을 짓던 시절이다. 나이스교복은 시간 속으로 사라졌고, 강춘교복은 스쿨룩스라는 이름을 달고 지금도 학생들을 만난다. 교복을 사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새 학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할 것이다.


큰길을 따라 시청광장 쪽으로 걷다 보면 명곡사가 보인다.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이 나오는 날이면 음반을 사기 위해 줄을 서던 곳이다. 아이돌 음반을 사러 갔다가 사장님의 추천으로 메탈리카 같은 밴드를 알게 되기도 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사러 갔다가 몰랐던 음악 하나를 새로 알고 나오던 곳이었다.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가 된 지금도 명곡사는 그 자리에서 음악을 판다.

명곡사를 지나 지하상가로 내려간다. 1990년대 중고등학생들에게 이곳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만남의 광장’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추위를 피했다. 한쪽에서는 인근 학교 학생들이 춤을 연습했고, 보세 옷과 신발, 액세서리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상품까지 구경할 것이 넘쳐났다. 시험이 끝난 날이면 돈카돈까에서 샐러드돈가스를 먹고, 옷가게와 신발가게 사이를 쏘다녔다. 상점들은 많이 바뀌었지만, 오래된 가방가게와 어르신들의 사랑방이 된 이레슈퍼 같은 작은 매장들이 여전히 지하상가의 일상을 채운다.




걸어서 원도심 속으로

지하상가에서 나와 조운동과 낙원동 골목으로 발길을 돌린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세탁소와 식당 사이로 녹색시간, 히로 같은 낯선 이름도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골목에 새로운 취향이 조금씩 스며드는 중이다. 다시 명동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닭갈비 골목 입구에는 커다란 닭 조형물이 서 있다. 골목에는 춘천 사람들끼리 통하던 주문법도 있었다. 둘이 가면 2인분 대신 ‘기본’을 시키고 밥과 사리를 하나씩 볶아 먹으면 충분했던 시절이다. 주문은 간단했다. “저희, 기본이요.”

모범약국, 청구서적, 학문사.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춘천 사람들의 단골 약속 장소였다. 서점에서 책을 넘기며 늦는 친구를 기다리는 일도 흔했다. 청구서적이 문을 닫은 뒤 한동안 명동에서 보기 어려웠던 책방이 최근 다시 생겼다. 책과 와인을 함께 즐기는 ‘하우동설’이다. 사라진 약속 장소를 대신해 새로운 세대가 다시 책방에서 사람을 기다린다.

스티커사진이 포토이즘이 되고 인생네컷으로 바뀌었어도, 명동에 나오면 친구들과 사진 한 장 남기는 일은 여전하다. 브라운5번가 입구의 엠분식에서 매운 어묵과 떡꼬치를 하나씩 집어 드는 풍경도 오래됐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먹던 달달하고 매콤한 맛 그대로다. 극장에 가기 전에도, 쇼핑하다 출출할 때도 이 앞에서 한 번쯤 멈췄다. 명동은 역시 친구들과 어울려 걸어야 제맛이다.

육림고개 오르막길을 오르면 올챙이국수 간판 앞에서 걸음이 절로 멈춘다. 옥수수 반죽을 구멍 뚫린 틀에 툭툭 떨어뜨려 만든 노란 면발이 올챙이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 올챙이국수다. 어릴 땐 꼴도 보기 싫었다던 올챙이국수가 나이가 들수록 생각난다며, 엄마가 종종 사 오시곤 했다. 노란 올챙이 같은 면발에 양념장을 곁들여 후루룩 한 그릇 비워내는 맛. 생각만 해도 마음 한편에 노란 달맞이꽃이 핀다. 퐁퐁 소리를 내며.


고갯길을 내려와 중앙시장으로 향한다. 어린 시절 이곳에서 가장 탐났던 것은 신발이었다. TV에서 보던 만화 속 주인공이 그려진 '아티스' 운동화를 신는 것만으로 그렇게 든든하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 시절엔 다들 만화를 좋아했으니까. 1977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영진신발을 지나 제일종합시장(제일백화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엄마들의 '진짜 아지트'였다. 멈춰버린 시계 약을 넣으러 가던 수리점부터 햇볕을 받으면 색이 바뀌는 머리띠, 원색의 일본산 보온도시락까지 구경할 것이 가득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때의 가게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제이셀렉트에는 엄마가 사 간 옷을 보고 딸이 다시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수십 년 장사로 쌓인 눈썰미로 손님에게 어울릴 옷을 척척 골라주는 것도 이곳만의 방식이다. 홍천과 가평, 화천 등 인근 지역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단골도 있다. 유행은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물건을 고르는 안목과 단골의 믿음은 그렇게 세대를 건너 이어진다.

원도심에 남아 있는 것은 오래된 건물이 아니라 그 세월을 함께 견딘 기억들이었다. 어디서 교복을 맞췄는지, 어디서 친구를 기다렸는지, 엄마 손을 잡고 무엇을 골랐는지. 그런 사소한 추억들이 여전히 골목 곳곳에 배어 있다. 날 좋은 날, 원도심을 천천히 걸어보자. 오래전의 춘천도, 오래전의 나도 그 길 위에서 반갑게 다시 만날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