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흥냉면옥 3대 박정준 사장>

나는 평양냉면을 좋아한다. 맑은 육수와 곡향 가득한 면발의 조화로움이 좋아 유명한 집을 찾아다니며 먹을 정도로 평양냉면에 진심이다. 하지만 이런 진심을 흔드는 곳이 있다. 시청 옆 함흥냉면옥이다. 평양냉면을 먹으려다가도 이 집이 떠오르면, 나는 매번 이곳으로 발길을 돌리고 만다. 함흥냉면옥. 여기가 내 인생 첫 냉면집이다. 열한 살,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던 때도 이 한 그릇만은 남김없이 비웠다.

볕은 두꺼워지고 이불은 얇아지는 여름이 오면,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명동에 나갔다. 여름을 준비하는 하루는 정해진 순서를 따라 흘렀다. 중앙시장에 들러 이불 수선을 맡기고, 식구들 계절 옷 하나씩 사서 하늘색 봉투에 담고, 시내 한 바퀴 구경하다 청구서적에서 만화책 몇 권 고르고 나면, 늦은 점심은 언제나 함흥냉면옥이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냉면집 작은 방에 앉으면, 할머니는 늘 내 몫으로 냉면 한 그릇을 따로 시켜 주셨다. 그 냉면을 비우는 것으로 하루의 나들이는 완성됐다. 1998년 여름의 일이다.
할머니는 만주에서 무역을 하던 집 딸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모든 것을 잃고, 남쪽에서 할아버지를 만나 춘천에 자리 잡았다. 아이 다섯을 낳아 길렀다. 전쟁을 겪은 사람에게 먹이는 일은 살리는 일이었다. 철이 되면 독에 된장을 담그고, 사위들이 오면 손수 기른 닭으로 백숙을 내셨다. 밤이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친 몸을 쑥뜸으로 다스리던 사람. 먹는 일을 삶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고, 사람 먹이는 일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여기신다. 그러니 냉면집에 앉아서도 할머니의 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함께 나온 온육수를 한 컵 따라 간장을 조금 타서 내 앞에 놓아주셨다.

<함흥냉면옥에서 반드시 마셔봐야할 온육수>

<명태회가 넉넉히 들어간 함흥냉면>
함흥냉면옥
🎯위치: 시청길 16-1
📞전화: 254-4994

함흥냉면옥 입구에는 신문 기사 한 장이 액자에 걸려 있다. 오래 다니면서도 지나쳤던 그 기사는 공교롭게도 1998년, 내가 할머니 손을 잡고 함흥냉면옥을 드나들던 바로 그해에 쓰인 것이었다. 기사에 함흥냉면옥은 함경도에서 피난 온 문금복 할머니가 1959년 문을 열었다는 이야기와 음식은 팔려고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먹을 기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예순일곱 해를 지킨 함흥냉면옥의 철학이 적혀 있다. 그 철학은 지금도 주방에서 이어지고 있다.

<함흥냉면옥의 일대기를 취재한 1998년 신문 기사>
지금 주방을 지키는 사람은 박정준(44) 사장이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자식만은 고된 냉면집 일을 하지 않길 바랐지만, 그는 스물다섯에 스스로 앞치마를 둘렀다. 그 뒤로 스무 해 동안 새벽부터 면을 반죽하고 육수를 끓이고 고명을 무치는 일을 반복하며 손맛으로 전해지던 조리법을 정리했다. 그가 주방을 맡은 스무 해 동안에도 주변 환경은 쉼 없이 변했다. 오랜 거래처의 사정이 바뀌기도 하고, 세월에 따라 손님의 입맛도 조금씩 달라졌다. 외부의 변화에도 그가 지키려 한 것은 예순일곱 해를 지나온 맛이었다. 그는 몸이 버텨주는 한 계속 주방을 지킬 생각이라고 했다. 변함없이 맛을 지킬 테니, 많이 사랑해달라는 그의 진심이 경건하게 느껴졌다.

<긴 시간 동안 많은 손님이 방문한 흔적>

할머니는 늘 함흥냉면옥이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이 이북 냉면을 파는 집이니, 그 냉면을 먹는 마음이 남달랐을 것이다. 이제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 오시지 못한다. 여름이 오면 새콤달콤한 함흥냉면과 진한 온육수 이야기를 꺼내신다. 할머니가 그리워하는 건 냉면뿐 아니라 그 시절 여름일 것이다. 볕이 두꺼워지는 계절이 오면 나는 함흥냉면옥을 찾는다. 냉면 한 그릇을 비우는 동안 할머니와 작은 방에 마주 앉아 도란도란 냉면을 먹던 기억을 떠올린다. 여전히 할머니가 드시던 그 맛을 나도 똑같이 맛볼 수 있다는 게 기쁘다. 그 맛을 변함없이 지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 자리를 지킨 가게는, 사람들의 시간을 품고 있다.

<물냉면에 빠진 아들>
요즘 나는 세 살배기 아들의 손을 잡고 함흥냉면옥에 온다. 아들은 물냉면을, 나는 함흥냉면을 시킨다. 할머니가 내 몫으로 냉면 한 그릇을 따로 시켜 주셨듯 이제는 내가 아들 앞에 냉면을 놓는다. 아들은 따뜻한 온육수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차가운 냉면 국물을 한 모금 넘긴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부지런히 오가는 작은 입을 보고 있으면, 할머니가 내게 먹이던 마음이 이제 내 손을 거쳐 아들에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내 아들도 제 아이의 손을 잡고 이 냉면을 먹으러 오면 좋겠다. 함흥냉면옥이 오래오래 남아서, 이곳을 오간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그저 묵묵히 품어주는 공간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