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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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25

2026-06
#누군가의춘천
춘천이 품은 삶과 사람 이야기
용산리, 달롱
글 서현숙. 1972년생 작가. 『소년을 읽다』, 『변두리의 마음』, 『난처한 마음』 등을 썼다.
그림 공혜진. 자연물이나 일상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린다.





포털 사이트에서 ‘춘천시 신북읍 용산리’를 검색해 보았다. 내 기억 속의 용산리는 ‘용산 저수지’를 중심으로 한 작은 마을인데, 지도상의 용산리는 북한강을 끼고 아리산 근처부터 춘성대교까지 이르는 큰 마을이었다. 용산리가 이렇게 큰 동네였나. 오랫동안 어떤 대상의 크기를 1㎡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실은 100㎡의 거대한 존재임을 뒤늦게 알게 된 기분이다. 


춘천 신북읍 용산리는 내 외갓집이 있는 마을이다. 자가용 있는 집이 드물었던 시절, 외갓집에 가려면 춘천댐 쪽으로 향하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용산1리 큰길에서 내렸다. 거기서부터 외갓집까지 걸어가야 했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대로에 서 있을 때만 해도 ‘춘천’이라는 세계에 있는데, 외갓집을 향한 길에 서면 ‘다른 세계’로 들어갔다. 


그 길은 자동차 일방통행밖에 안 될 만큼 좁고 변변한 상점이 없었다. 시골집 지붕과 담장, 남의 밭을 보면서 걷다 보면 외갓집 동네에서 유일한 상점을 만난다. 여기가 외갓댁으로 걸어가는 길에서 내가 정한 첫 번째 포인트다. 가정집인데 마루에 간단한 과자나 생필품을 갖춰놓고 판다. 과자 한 봉지 사려면 툇마루를 향해 원하는 품목을 주문해야 했다. “새우깡 하나 주세요!” 이렇게 말이다.


가게에서 구입한 과자를 먹으면서 왼쪽에 산을 끼고 야트막한 고개까지 걷는다. 그 고개가 두 번째 포인트였다. 그곳에 서면 드디어 동네의 상징이라 할 만한 큰 저수지를 만난다. 오른쪽에 저수지를, 왼편에 산비탈을 두고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저편에 큰외삼촌 집이 보였다. 두 개의 포인트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포인트를 지나왔음을 뿌듯해하면서 걸어가면 덜 지루했다.





행정구역상 춘천에 속한 동네이고 동네 안쪽에서 저 멀리 춘천이 보이는데, 용산리는 깊은 시골 같았다. 춘천 인근 동네라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어른이 된 이후에도 동네는 큰 변화가 없다. 여전히 변변한 가게 하나 없고 층수 높은 건물이 생기지도 않았고 가구 수가 늘지도 않았다. 


어른이 된 후 큰길에서 외갓댁까지 걸어간 적이 있는데, 깜짝 놀랐다. 그렇게 멀게 느껴졌는데 1km에 불과한 거리였다. 저수지가 작아서 한 번 더 놀랐다. 어린 마음에는 1km가 멀고 지루하게 느껴져 마음의 포인트를 몇 개씩 정해두고 걸었다. 내 눈에는 저수지가 호수처럼 크게 느껴졌다. 


용산리에 가면 방문할 집이 많았다. 큰외삼촌 집, 작은외삼촌 집, 그리고 외할아버지 집이 있었다. 저수지를 지나 첫 번째로 만나는 집이 큰외삼촌 집이다. 나무로 지어진 옛날 한옥이었고 신발을 벗고 댓돌에 올라서서 대청마루에 올라가야 했다.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왼쪽에 안방과 부엌, 오른쪽으로 작은 방이 두 개 있었다.


큰외삼촌 집 안방에 있던 벽장 다락을 좋아했다. 방 아랫목 쪽 벽면 상층부에 미닫이문으로 된 벽장이 있었다. 거기에 들어가려면 다락 문을 옆으로 밀어 열고 다락 위로 기어 올라가야 했다. 다락 안에는 큰외숙모가 명절 때 만들어 두었던 산자(과줄)나 약과가, 가을에 수확하여 저장해 둔 고구마가, 간혹 과자 봉지가, 그리고 사용하지 않는 세간이 있었다. 나는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던지라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다락을 좋아했던 것 같다. 거기 기어 올라가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이제 지상으로 내려가 볼까. 다락에서 기어 내려올 때 방바닥에 제일 먼저 닿는 신체 부위는 발바닥이었다. 겨울에 발바닥이 방에 닿는 순간 짜릿했다. 거기는 윗목이었던 거다. 큰외삼촌 집 안방은 길이가 긴 직사각형 모양이었는데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 차이가 극명했다. 아랫목은 장판이 갈색으로 익을 정도로 뜨거웠고 윗목은 발바닥이 닿으면 정신이 번쩍 날 정도로 차가웠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무렵 방학이면 친척 집에 며칠씩 놀러가는 게 당시의 유행이었다. 그러니 방학이면 용산리에 가서 며칠씩 지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큰외삼촌 집에서 나와 왼쪽으로 급히 꺾어진 길을 뛰어 재를 넘는다. 왜 그게 ‘재’인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내 머리에 “재를 넘으면 외할아버지 집이 있어.”라는 문장이 입력되어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재’는 ‘길이 나 있어서 넘어 다닐 수 있는, 높은 산의 고개’라고 한다. 외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고개는 높지 않아서 어린 내게도 만만했다. 숨찰 틈도 없이 구릉 같은 언덕길을 한달음에 뛰어가면 저 아래에 외할아버지 집이 보였다. 기와 얹은 나무집이어서 ‘갈색집’으로 기억한다. 집 옆에 키 큰 나무들이 있어서 큰 나뭇가지에 살짝 그늘져 보이는 집이었다. 양쪽으로 잡아 여는 나무 대문을 열고 높은 문지방을 넘어 들어서면 마당이, 마당 건너편에 집이 있었다.




사실 나는 외할아버지 댁의 풍경 대부분을 잊어버렸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도 잘 모르겠다. 외조부모님이 재 너머 집에 계속 사시지 않고 작은외삼촌 집으로 살림을 합하여 집을 옮겼기에 내 기억은 더 흐릿해졌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재 너머’에 살던 사람은 내게 두 분뿐이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봄날 엄마랑 작은외삼촌 집에 갔던 적이 있다. 할아버지가 “마당 가생이에 달롱이 아주 많다. 달롱 캐 가.” 하셨고, 엄마는 마당 비탈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달래를 캤다. 달래 뿌리에 흙이 줄줄 달려나왔다. 엄마는 그걸 돌에 살살 쳐서 흙을 털어냈다. 달래 뿌리에 머리 같은 게 달려있다. 동그랗고 뽀얀 작은 구슬 같은 것. 엄마가 이런 말을 했다. “달래 머리 귀엽지? 그래서 애기들 귀여운 머리 보고 달롱 머리 같다고 하는 거야.”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슬며시 웃으셨던 것도 같다. 사방천지에서 달롱 향이 풍겨오는 따뜻한 봄날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체구가 작았다. 눈 위의 눈썹이 유난히 길고 얼굴이 참외 같은 인상이었다. 말씀이 그다지 많지 않고 점잖으셨다. 엄마 말로는 할아버지는 과식하는 걸 아주 싫어하신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 용산 저수지가 만들어졌는데, 할아버지도 그때 저수지 만드는 일을 하셨다고 했다.


겨울에 가면 화로 위에 쇠 작대기를 얹어 놓고 그 위에 간식거리를 얹어놓으셨다가 주셨다. 그중에는 귤도 있었다. 어떨 때는 아랫목에 묻어둔 귤을 꺼내주기도 하셨다. 이러나저러나 뜨뜻한 귤이었다. 어린 나는 뜨뜻한 귤이 괴상하게만 여겨져서 받고도 먹은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연로해지셔서 치아가 좋지 않으니 귤도 데워서 드셨던 건데, 어린 나는 좋아하기 힘든 귤이었다 .


외할아버지는 아흔 넘게 사셨다. 정갈하게 사셨고 병원 신세 질 일도 없이 사셨다. 생의 마지막을 댁에서 보내셨는데, 마지막 인사가 될 것 같아서 찾아뵈었다. 내가 대학생일 때였다. 방에 들어가니 두툼한 담요 위에 어깨까지 가려지게 이불을 덮은 할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라서 “많이 편찮으세요, 할아버지?” 했다. 할아버지는 잠긴 목소리로 “괜찮아.” 하시더니, 베고 계신 베개 아래에서 뭘 꺼내셨다.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었다. 약간 구겨진. “공부 열심히 해.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생의 마지막 인사가 되리라는 걸 짐작하고 계셨던 것 같다. 모아놓으신 돈을 베개 밑에 넣고 계시다가 집안의 아이들이 인사하러 오면 마지막 선물을 주셨다. 구깃한 만 원 지폐를 책 사이에 한참 동안 넣고 다녔다.


이 봄에도 용산리에 달롱 향 머물렀을까. 문득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