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천에서 나이 든다는 건 어떤 것일까. 집에서 따뜻한 밥을 받고, 화장실 손잡이를 잡고 일어서고,
밤새 누군가 안부를 살펴주는 것. 넘어지지 않도록 운동을 배우고,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주는 이웃이 있는 것.
경로당에 모여 땀 흘려 운동하고, 오지 마을에서도 택배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춘천에서 나이 드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든든하다.


수술 후 거동이 불편해진 최봉순(가명·93·석사동) 어르신에게 오전 11시는 가장 반가운 시간이다.
문을 열면 조끼를 입은 배달원이 따뜻한 도시락 가방을 건넨다.
“반찬이 입맛에 맞으셨어요?”
그 짧은 인사도 하루 중 처음 듣는 목소리다. 수술하고 나서는 부엌에 오래 서 있는 일이 힘들어졌다.
밥과 반찬을 집에서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한결 안심된다.



퇴원하고 처음 화장실에 들어섰을 때는 벽부터 짚었다. 잡을 데가 없어서 아찔했다.
방으로 들어올 때마다 걸리던 문턱도 늘 신경이 쓰였다. 이제는 벽에 손잡이가 생기고, 문지방도 낮아졌다.
가스 불을 켜고 나와도 예전만큼 마음이 조급하지 않다.


불을 끄고 나면 집이 참 조용하다. 무릎 위에 돌봄인형을 올려두고 등을 토닥인다.
“오늘 하루 어떠셨어요?” 대답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좀 풀린다.
잠든 사이에도 집 안의 신호는 읽힌다.
전력과 통신 사용이 평소와 달라지면 돌봄 담당자에게 알림이 간다. 잠들어도 괜찮다.
춘천이 깨어 있으니까.


진료 날 아침이면 예전처럼 마음이 조급하지 않다. 그동안 병원도,
관공서도 혼자 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함께 가는 사람이 있고, 봄내콜 택시가 이동을 돕는다.
병원을 다녀오는 길이 예전보다 훨씬 가볍다.
* 이 이야기는 실제 통합돌봄서비스를 받고 계신 춘천 시민의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5월 11일 오전, 망대길의 작은 골목 안. 붉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반명순(74) 어르신의 거실에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매주 두 번 집을 찾는 임성택(33) 운동지도사와 함께하는 낙상 예방 방문운동 시간이다.
지난해 9월, 반 어르신은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일을 하다 자꾸 넘어졌다. 차가 와도 발이 바닥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고, 근육이 뻣뻣해져 뒤에서 누가 부르면 돌아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지만 몸이 따라오지 않았다. 완치가 없는 진행성 질환이기에, 병의 속도를 늦추는 운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벌써 여덟 번째 수업이다. 의자에 앉았다 일어서기부터 시작한다. “하나! 두~울!” 구령에 맞춰 일어설 때마다 식재료 이름을 하나씩 외친다. “계란! 두부! 오이! 고사리!” 근력과 기억력을 동시에 쓰는 훈련. 계란부터 피망까지, 열 가지를 다 외칠 때까지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 “처음엔 네 개도 못 외우셨는데 이제는 열 개를 훌쩍 넘기세요.”
다리에 밴드를 걸고 근력을 키우고, 냉장고 앞 계단을 오르내리고, 눈을 감고 균형을 잡는다. 임 지도사가 등을 살짝 밀어본다. “버티세요.” 반 어르신이 버틴다. “잘 버티셨어요!” 50분이 지나자 두 사람 모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임성택 지도사는 “파킨슨병은 신체와 인지를 동시에 자극하는 ‘이중 과제 훈련’이 핵심”이라며 “뇌의 다른 경로를 활성화해 보행 중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는 과학적 재활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수업이 끝나고 임 지도사가 양말 고무줄까지 살핀다. “발목의 작은 압박도 어르신에겐 부종과 감각 저하를 일으켜 낙상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지도사의 세심한 손길에 어르신이 웃는다. “저번에 지도사님이 꽉 끼는 양말 발목을 가위로 다 잘라주셨잖아요.”
반 어르신은 운동이 없는 날에도 혼자 연습을 이어간다고 했다. “와서 운동 시켜주니 좋은 건 말해 뭐해. 말벗도 되고. 춘천이 노인들한테 정말 좋은 걸 많이 해주는 것 같아요.”

"내 집이 병원이었네" 병원에 가기 어려운 어르신에게 춘천시는 집으로 직접 찾아간다. 방문운동관리 외에도 약사가 집을 방문해 복약을 지도하는 방문복약관리, 구강건강을 살피는 노인방문구강관리, 의사가 직접 가정을 찾아 진료하는 방문 진료 및 재택 의료까지. 병원 문턱이 높을수록, 춘천의 발걸음은 더 가까워진다. |
임성택 운동지도사의 구령에 맞춰 맞춤형 낙상 예방 운동을 하고 있는 박명순 어르신. 세심한 돌봄 속에서 어르신의 일상에는 다시 건강한 활력이 채워지고 있다.



그냥드림 매장을 찾은 시민이 시니어 근무자들의 환대 속에서 필요한 물품을 고르고 있다.
5월 12일 오전 10시, 춘천 중앙로의 한 매장. 신동면 증2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온 김필옥(85), 정태순(80) 어르신이 굽은 허리를 펴며 문을 열었다. “누가 거기 가면 도움을 준다길래...” 머쓱해하는 어르신들을 맞이한 건 노란 조끼를 입은 시니어 참여자들의 환한 미소였다. “여기 왔다 간 사람이 ‘거기 가봐요~’해서 왔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뭘 아나.”
이곳은 춘천시의 ‘그냥드림’이다. 신분증을 확인하고 간단한 신청서를 작성하면 2만 원 한도의 먹거리를 골라서 가져갈 수 있다. 이현탁 기초푸드뱅크 사회복지사는 이 사업이 당장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을 바로 지원하는 동시에, 상담 과정에서 더 깊은 복지서비스가 필요한 이들을 발견해 연결하는 ‘안테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긴급하게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자존심 상하지 않고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첫 번째 언덕이 되고자 합니다.”
이날 퇴계동에서 온 노부부는 ‘같은 날은 가족당 한 명만’이라는 원칙 때문에 잠시 안타까운 상황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근무자들은 어르신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말 한마디를 고르며 곁에 섰다. “다음에 다른 분이 오시면 드릴 수 있어요”라며 부드럽게 안내하는 손길에 머쓱함은 어느새 “고맙다”는 인사로 바뀌었다.
은퇴 후 이곳에서 일을 시작한 윤후원(62) 씨는 “상담하다 보면 각자의 삶이 참 짠해서, 이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 실감한다”며 눈을 반짝였다. “곧 냉장고가 들어와요. 냉동식품도 나눠드릴 수 있게 될 것 같아서 정말 설레요.” 이현탁 사회복지사가 기억하는 가장 뭉클한 순간은 한 이용자의 고백이었다. “물품을 받아 가시며 ‘죽으려던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하셨어요. 단순히 라면이나 쌀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잊히지 않았다는 연결감을 느끼신 거죠.“
지난해 12월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그냥드림은 올해 4월 중앙로로 자리를 옮기며 접근성을 높였다. 지금까지 1,216명의 시민이 이곳을 다녀갔다. “배고픔 때문에 절망하는 시민이 단 한 명도 없는 춘천을 꿈꿉니다.“
윤후원 씨가 김필옥·정태순 어르신과 상담을 나누고 있다.
그냥드림
* 후원참여 강원도민일보(백미천사 캠페인), 농협, 새마을금고, 신한은행, 춘천시 수영연맹, 더픽트, 춘천시 번영회, 한국타이어춘천(주) 등 릴레이 기부가 돌봄체계를 뒷받침하고 있다. |



우두동 강변 코아루 아파트 경로당에서 하얀 도복에 빨간 띠를 두르고 힘차게 품새를 연습하는 어르신들. 청춘의 에너지가 가득하다.
5월 14일 오후 1시 우두동 강변코아루 아파트 경로당. 문을 열자마자 하얀 도복을 맞춰 입은 어르신들이 일제히 “태! 권!” 하고 기합을 외치더니 이내 아이처럼 깔깔거리며 웃음꽃을 피운다. 평균 나이 84세, 가장 어린 막내가 79세인 이곳 어르신들의 허리에는 모두 당당하게 ‘빨간 띠’가 매여 있다. 7월에 있을 공연을 준비하며 도복을 새로 맞춘 어르신들은 서로의 허리띠를 묶어주느라 분주했다.
“도복 입으시니까 더 잘하시는 것 같아요. 코아루는 대단해. 다른 경로당은 누님들뿐인 ‘여인천하’인데, 여기는 멋진 형님들도 네 분이나 나오시잖아!” 공인 7단의 베테랑 강성섭(67) 한얼태권도 관장의 인심 좋은 농담에 경로당 강당이 들썩인다. 손목과 발목을 푸는 몸풀기 스트레칭으로 시작된 수업. “무겁죠? 신발 신고 안 신고가 천양지차예요.” 관장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너도나도 신발을 벗는다.
잠시 후 의자를 뒤로 빼고 줄을 맞추자 본격적인 품새 훈련이 시작된다. 오늘 도전할 과제는 태극 1장부터 난이도가 높은 3장까지. “왼발 내딛고 오른손 지르기!” 관장의 구령에 맞춰 허공을 가르는 손길이 제각각이다. 움직임의 속도가 저마다 달라 마치 도미노가 넘어가듯 차례차례 동작이 완성되고, 손날찌르기를 하며 뒤를 돌 때는 스텝이 엉켜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하지만 품새가 시작될 때 “얍!” 하고 소리치는 어르신들의 진지한 눈빛과 표정만큼은 올림픽 국가대표 못지않게 빛나고 당차다. 강 관장은 연신 어르신들을 치켜세운다. “틀려도 괜찮습니다. 안 틀리려고 머리를 쓸 때 뇌세포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거니까요. 이 순서를 다 외워서 따라 하시는 것 자체가 엄청 대단하신 겁니다.”
이날 유독 눈에 띈 이는 강변코아루 아파트 경로당 허재호(88) 회장과 최문정(79) 총무 부부였다. 최 총무가 “젊을 땐 같이 뭘 해본 적이 없는데, 이제는 같이 태권도도 배우고 참 좋지요”라며 수줍게 웃자, 옆에 있던 어르신들이 “조만간 둘이 싸우면 태권도 더 잘하는 총무님이 이길 거야!”라며 짓궂은 농담을 던져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쉬는 시간, 김정님(85) 어르신이 TV 속 트로트 가수처럼 검지 손가락을 까딱이며 노래를 시작하자 11명의 어르신이 일제히 떼창으로 화답한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태권도 하기 딱! 좋은 나인데!”
춘천시가 (사)대한노인회 춘천시지회에 위탁해 운영하는 ‘경로당 순회 프로그램’은 이처럼 어르신들의 삶을 정적인 휴식에서 역동적인 도전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이 나이에 어디 가서 태권도복을 입어보겠냐”며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어르신들. 춘천에서 나이 드는 일은, 이토록 푸르고 청춘 같다.
배움과 신명이 가득한 곳, 우리 동네 경로당의 변신 춘천시는 242개 경로당을 순회하며 태권도, 요가, 노래 교실 등 16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

동면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서 오지마을로 배달할 물품을 싣기 전 활짝 웃어보이는 오지택배 전담 시니어 참여자들. 왼쪽부터 홍천표(80), 변경훈(67), 김성업(72)
5월 14일 오후 3시, 동면행정복지센터 앞마당. 정적을 깨고 대한통운 택배 차량이 들어서자 노란 조끼를 입은 세 명의 시니어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품걸리 있어요?” 김성업 어르신의 물음에 젊은 택배 기사가 상자를 들고 달려오며 익숙하게 답한다. “예, 있어요~”
춘천미래동행재단에서 운영하는 ‘오지택배’는 춘천시 내 12개 오지 마을을 대상으로 펼쳐지는 춘천시 노인일자리 사업이다. 동면 상걸리와 품걸리, 사북면 가일리, 북산면 부귀리 등 버스마저 잘 닿지 않는 산간 오지 주민들의 정주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만 65세 이상 어르신 12명이 자차를 몰고 매일 온기를 나르고 있다. 이 사업이 있기 전에는 오지 주민들이 생필품이나 자녀들이 보낸 선물을 받으려 해도 이동 수단이 없어 면행정복지센터나 이장 집까지 먼 길을 직접 찾아가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이날 배달할 물품 3개를 꼼꼼히 챙겨 상걸리로 향하는 변경훈(상걸1리·평촌리 담당) 어르신의 트럭에 동승했다. 굽이진 산길을 달려 사과 농장(왕시루봉 농원)을 운영하는 황옥주 씨 댁 앞에 멈춰 선 트럭. 변 어르신이 전화를 걸자 저 멀리서 남편 이환우 씨가 환한 미소로 걸어 나온다. “어서 와요!” 오늘 배달된 상자 속 내용물은 서울의 유명 제과점에서 처형이 보내온 단팥빵이다. “사과 적과(열매 솎기)하느라 고생할 때면 늘 이렇게 맛있는 빵을 보내줘요. 일하다가 새참으로 먹으라고요.”

택배상자를 건네는 변경훈 어르신
오지 택배원들은 단순한 배달원이 아니다. 이들의 진짜 임무는 ‘홀몸 어르신의 안부 확인’이다. 3년째 이 일을 해오고 있다는 변경훈 어르신은 “내 힘으로 용돈을 벌어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손주들에게 용돈까지 줄 수 있어 정말 행복하다.”며 활짝 웃었다. 고유가 시기라 지원되는 유류비가 턱없이 부족하지만, 품걸리를 담당하는 김성업 어르신은 묵직한 사명감을 꺼내 보였다. “단순히 물건을 배달하는 게 아닙니다. 이웃의 안부를 확인하고 안전을 지킨다는 봉사 정신과 사명감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배달을 마치고 다시 거친 산길을 돌아서 내려가는 하얀 트럭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굽이진 산골짜기마다 온기를 싣고 달리는 어르신들의 트럭이 있기에, 춘천의 가장 깊은 오지마을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반가운 설렘이 배달된다.
춘천미래동행재단 오지택배 문의 070-4141-8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