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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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24

2026-05
#도란도란
김옥자 관장의 늦깎이 봄
시민기자가 취재하는 춘천시민 이야기



김옥자 관장이 남편 전상국 소설가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소녀가장으로 버틴 시간

“새싹이 나와야 하니까 묵은 가지는 정리를 해야지요.” 김옥자(83) 관장의 하루는 정원에서 시작됐다. ‘전상국 문학의 뜰’은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전상국(86) 소설가의 작품 세계와 자료들을 한데 모은 공간으로, 문학관과 넓은 정원이 어우러진 열린 문화 공간이다. 3,000평에 이르는 뜰을 돌보며 계절을 맞이하는 김 관장의 모습에서 이곳이 왜 ‘문학의 뜰’인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김 관장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6·25 전쟁 당시 7세였던 그는 전쟁 속에서 가족을 여럿 잃었고, 17세부터는 집안의 무게를 짊어진 소녀가장으로 살아야 했다. 밭일을 하며 살림을 보태던 그는 우체국 정규직 시험 소식을 듣고 서울로 향했다. 교재와 시험장에 입고 갈 옷은 친구에게 빌렸다. 봄에 꺾은 고사리를 팔아 구두를 맞췄다. 가장 힘들었던 건 어린 나이에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막막함이었다. 서울로 향하던 날에도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고. 수천 명이 몰린 시험에서 합격 소식을 받았을 때, 그는 하늘에서 인생에 동아줄을 내려줬다고 생각했다.


사업가의 꿈에서 문학의 동지로

젊은 날 꿈은 사업가였다. 홍천강변에 공장을 짓고, 더 나아가 호텔까지 세워보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생각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우체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전상국 소설가를 만나면서 삶은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일을 그만두고 시작한 결혼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세 아이를 키우고, 양가 어른을 모시고, 동생들 공부까지 챙기며 삶의 무게를 홀로 감당했다. 그 시간 속에서 그는 남편이 문학에 몰두할 수 있도록 묵묵히 곁을 지켰다. 처음부터 문학을 가까이 두고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문학의 뜰을 가꾸고 공부를 이어가면서 남편의 작품 세계를 조금씩 더 깊이 체감했다. 원고를 함께 들여다보거나 작품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자연스레 늘어났고,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부부를 넘어 문학을 함께 지키는 동지가 됐다. 귀한 책과 자료들이 흩어지지 않고 문학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공간으로 남았으면 한다는 바람도 그렇게 자라났다. 그 마음이 쌓여 지금의 전상국 문학의 뜰이 만들어졌다.


늦깎이 배움, 문학을 같은 눈높이로

여든이 넘어 다시 학생이 된 이유도 결국 이 문학관 때문이었다. 문학의 뜰을 관리하면서 조경과 농학을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2019년 방송통신고를 졸업한 뒤 한국방송통신대 농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올해 2월, 마침내 졸업장을 받았다. 정원과 나무를 더 잘 돌보기 위해 시작한 공부였지만, 인문학과 철학 수업을 들으며 문학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생활을 책임지느라 가까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문학을 이제는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게 된 셈이다.


김옥자 관장은 앞으로도 힘이 닿는 데까지 이 공간을 지키고, 언젠가는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입장료를 받지 않고 무료로 정원을 개방하는 일 또한 작은 봉사”라고 말했다.


소녀가장으로 시작해 사업가의 꿈을 품었고, 이제는 문학의 뜰을 지키는 주인장이 된 김 관장. 오래 품은 마음으로 가꿔온 이 뜰이 문학을 꿈꾸는 다음 세대에게 언제든 찾아와 머물 수 있는 따뜻한 쉼표로 남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