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빗물을 노란색으로 표현했어요. 비는 투명하지만, 조명에 따라 색을 달리하죠. 미술은 형태로 대상을 보여주는 조형 언어를 사용합니다. 작가의 재현적 표현에 집중하며 기법 변화를 체감해 봅시다.”
3월 31일 오후 2시 춘천미술관. 한영호 강원대 미술학과 명예교수가 진행하는 수업이 한창이었다. 지역 예술을 통해 서양미술 기법을 피부로 느끼는 시간. 수강생 20명은 이민혁 개인전 ‘봄날, 봄내’를 둘러보며 독특한 화풍을 체험했다.
‘찾아가는 미술관’은 수강생들이 세계 유명 미술관의 작품을 간접 경험하고,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작가의 동시대적 고민을 체감하도록 기획한 강의다. 한영호 교수는 “미술 작품은 관객의 시선으로 완성된다”며 “함께 보고 느끼고 말하며 미술과 친해지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강의를 이끈 한 교수는 대학에서 20년간 현대 조형을 강의한 전문가다. 하지만 그도 곧 학생 신분으로 돌아간다. 6월부터 시작되는 춘천인생학교 2학기, 와인과 AI 강의를 수강하며 이웃과 어울리고 변화하는 기술에 적응하는 계기로 삼을 생각이다.
U3A란?
U3A(University of the Third Age, 제3기 인생 대학)는 자발적 학습 모임이다. 개인의 지적 성장에 관심을 두고 공동체 속에서 느슨하게 연결된다. 은퇴자가 주체가 되어 모임을 운영해 영국에선 노인 평생 교육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배우고(learn) 웃으며(laugh) 사는(live) 삶을 지향하며, 자신의 인생관을 나눈다는 점에서 시민 운동의 성격을 가진다. 국내에선 백만기 설립자가 2013년 분당아름다운인생학교를 세우며 처음 도입됐다.

한영호 강원대 명예교수는 춘천미술관에서 ‘찾아가는 미술관’ 강의를 진행했다.

춘천미술관을 찾은 춘천인생학교 수강생들은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동시대적 고민에 공감하고, 서양화의 표현 기법을 익히는 시간을 가졌다

강의가 마련될 수 있었던 건 U3A 덕분이다. U3A에서는 제3세대* 에 접어든 회원들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서로 가르친다. 배움 그 자체가 보상이다. 자격증이나 취업이 목표가 아니라 순수한 지적 탐구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노인은 ‘보호 대상’에서 벗어나, 생산적으로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주인공이 된다.
춘천에서도 자발적인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아름다운인생학교 U3A 춘천(이하 ‘춘천인생학교’)은 올해 3월 개교식 이후 5개 강의로 1학기를 시작했다. 한림대 금융재무학과 객원교수로 은퇴 설계를 강의하는 이덕수 교장이 영국 U3A를 접한 뒤, 학습 모임을 추진한 것이 계기였다. 은퇴자들이 건강하게 노후를 보내기 위한 ‘진입 장벽 없는 마을학교’를 만들고자 했다.
인생학교가 기존 평생 교육과 다른 점은 ‘자발적 네트워크’에 있다. 수강생이 비용을 내고 교육 서비스를 구매하는 개념이 아니라 회원들이 강사와 수강생 역할을 넘나들며 스스로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덕분에 최소한의 비용만 내고도 계속해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별도 강사비 없이 품앗이를 통해 강의를 마련하자 취지에 공감한 사람이 늘면서 한 학기 만에 회원 130명이 모였다.
국내에 영국 U3A를 처음 소개한 백만기 분당인생학교 초대교장은 ‘어른들을 위한 자율 학교’를 만들고자 했다. “노인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듯이 은퇴자가 보유한 사회적·지적 자산의 소멸은 사회적으로 큰 손해”라며 “분당을 시작으로 위례, 진주, 청주, 울산, 세종에 이어 춘천까지 시민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인생학교가 생겨 반갑다”고 말했다.
*제3세대(the Third Age):
가정과 직장에서의 책임을 어느 정도 내 려놓은 뒤, 개인의 성장과 발전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은퇴자를 일컫 는다. 평균 수명 연장으로 은퇴 후 사망에 이르는 기간이 20년 이상 늘 어나면서, 이 시기의 활동성이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코디네이터인 유경석 동아경제신문 대표가 강의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6월 개강하는 2학기엔 규모를 더 키운다. 각 분야 전문가인 강사(코디네이터)들이 16개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 현직에선 은퇴했지만, 왕성히 활동하는 전문가들이 특기를 살렸다. 여행 해설, 자산운용, 커피, 와인, 오페라, 클래식, 서양음악사, 미술, 시 쓰기, 독서 등 장르도 다양하다.
본업과 상관없이 취미로 즐겼던 분야를 강의로 만든 이들도 있다. 장승진 한국디카시인협회 강원지부 회장은 사진과 5행 이하의 시를 결합한 ‘찍고 쓰는 디카 시’를 강의한다. 35년간 시인으로 활동하며 춘천에 ‘디카 시(디지털카메라와 시의 합성어)’ 장르를 소개해 온 그의 새로운 출발이다. 수공예로 여러 전시를 해온 정영자 씨 는 ‘천 아트’ 수업을 준비했다.
은퇴자들이 새로운 기술에 접근하고 실생활에 활용하도록 돕기 위한 강의도 있다. AI 활용 영어 회화, AI 기반 자서전, AI 시대 금융 생활 등은 혁신 기술을 통해 인생을 돌아보고, 외국어 능력과 금융 상황을 점검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국어 교사로 퇴직한 강미자 씨는 ‘수다방’을 운영한다. 단어장과 이미지 카드, 짧은 영상을 활용해 새로운 주제로 대화하며 어휘력과 사고력을 키우는 수업이다. 비슷한 이야기만 나누게 되는 일상의 대화에서 벗어나 도구를 활용해 말하는 방식을 훈련한다.

춘천인생학교는 3월 13일 개교식을 열고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독서모임 수강생들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를 읽고 토론했다.

수다방(알쓸잡담)
강미자 국어 교사, 거꾸로 수업 전문가
커피로 여는 아름다운 세상
김명섭 한림성심대 명예교수, 전 한국커피협회 회장
독서모임
박광희 문학박사, 소설가, 필명 ‘신연강’
시맛(시 쓰기 입문)
송병숙 춘천문인협회 회장, 교장, 시인
돈과 인생 그리고 투자(자산운용)
안동규 한림대 명예교수, 수필가
AI 기반 자서전
유경석 동아경제신문 대표
AI 활용 영어 회화
윤미애·이연숙 영어 교사(수석교사)
AI 시대의 금융 생활
이덕수 한림대 객원교수, 은퇴디자인연구소장
클래식 음악 감상
이영진 음악평론가, 소설가, 교장
찍고 쓰는 디카 시
장승진 한국디카시인협회 강원지부 회장
조주현 춘천남성합창단장, 바람소리밴드 단장, 시인
서양음악사
이초롱 강원CBS소년소녀합창단 지휘자
돌아온 여행과 인류(여행 해설)
전운성 강원대 명예교수, 횡단 여행가
천 아트
정영자 천 아트 수공예 전문가
해설과 함께하는 오페라
최인숙 음악 교사(수석교사), 청정아트홀 관장
찾아가는 미술관
한영호 강원대 명예교수, 조각가
와인과 절친되기
홍성표 미래문화연구소장, 와이너리 디오니캐슬 대표
수강신청안내
45세 이상 시민이면서 가입비 1만원을 내면 춘천인생학교 회원이 될 수 있다. 학기당 활동비는 3만원으로 최대 3개 과목까지 신청 가능하다. 자세한 사항은 네이버 카페(cafe.naver.com/ccu3a) 또는 전화(010-9940-5719)를 통해 문의하면 된다.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힘을 모아 아름다운인생학교를 만들어가고 있다.

춘천시가 중장년 노후 준비를 위해 설립한 춘천미래동행재단도 힘을 보태고 있다. 재단은 올해 1월 춘천인생학교와 업무협약을 맺고 보건복지부 ‘노인 일자리 및 사회 활동 지원사업’을 통해 회원 및 수강 신청 관리를 도와줄 운영 인력 4명을 지원했다.
인생학교 강의 일부는 춘천시와 재단이 하나은행과 함께 마련한 하나50+컬처뱅크에서 열린다. 하나50+컬처뱅크는 하나은행이 춘천지점 2~3층에 조성한 중장년 대상 복합 문화·교육 공간이다. 재단이 운영하는 춘천지역노후준비지원센터도 같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춘천인생학교 운영과 관련해 춘천미래동행재단 관계자는 “은 퇴자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했다”며 “시민이 주도하는 다양한 노후 활동이 자리 잡길 바란다” 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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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수 교장은 “친구들과의 모임이 발전해 배움을 지향하는 수업이 되고, 여기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함께하는 선순환을 만들어가는게 인생학교의 목표”라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해 ‘자기(self)’를 찾고, 좋은 관계를 맺어야 성공적인 은퇴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