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2월, 춘천시가 유니세프 아동친화도시 인증을 받았다.
이것은 아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도시의 약속이다.
놀이터에서, 교실에서, 등굣길에서,
회의실에서. 춘천이 ‘어린이 수도’를 내걸고 펼치는 아동친화 정책의 현장 네 곳을 따라가 봤다.

신동초등학교 1학년 체육수업이 우두동 ‘톡톡놀이터’에서 열렸다
4월 14일 오전, 신동초등학교 후문에서 아이들이 줄지어 걸어 나 왔다. 1학년 3반 강신명 선생님의 체육시간, 오늘의 교실은 운동장 이 아니라 학교 바로 옆 톡톡놀이터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큰 나무 그늘 아래 모았다. 손에는 바른생활 1-1 교과서. 오늘의 주제는 ‘안전하게 놀아요’다. “여기 많이 와 봤지? 근데 반 친구들이랑 다같이 놀아본 적은 없잖아. 방과후 수업이나 학원 가느라.”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안전하게, 배려하면서 같이 뛰어노는 거야. 호루라기 세 번 불면 다시 여기로 모여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이 흩어졌다. 누군가는 암벽을 타고, 로켓그물망에 매달리고, 미끄럼틀을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강 교사는 철봉, 숲놀이터, 다인그네 사이를 오가며 아이들을 살폈다. 수업 막바지, 강 교사가 아이들을 미끄럼틀 그물놀이대 앞에 모았다. 한 명씩 그물을 타고 올랐다. 아이들은 먼저 올라가 보고, 매달려 보고, 내려오면서 스스로 규칙을 만들었다. 그물 사이를 기어가며 친구에게 길을 터주는 아이도, 위에서 기다리는 친구에게 손을 내미는 아이도 있었다.
강신명 교사는 “줄 세워서 구령 맞추는 체육보다, 같이 뛰고 부딪히면서 ‘어떻게 놀지’를 스스로 정해보게 하고 싶었다”며 “애들한테 그냥 자유롭게 놀 시간을 돌려주고자 했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연두색 아치가 하늘을 향해 열려 있고, 나무 결이 살아있는 놀이기구 사이로 소나무 그늘이 드리운다. 말랑한 우레탄 바닥은 초록·노랑·파랑으로 물들어 있다. 누군가 일부러 ‘아이의 속도’에 맞춰 배치해 둔 듯한 이 공간을, 아이들은 금세 자기들만의 도시처럼 점령한다. 아이들이 오기 전부터 낙엽을 쓸고 장난감을 씻어두던 김종옥 놀이터 안전지킴이는 분필 대신 빗자루를 든 또 다른 담임 선생님 같다.
톡톡놀이터는 춘천시가 2021년부터 조성해온 ‘봄내림놀이터’의 세 번째 작품이다. 1호 ‘잼잼’(동내면 거두리, 2021), 2호 ‘솔솔’ (퇴계동, 2023)에 이어 우두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이 다른 놀이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하나다. 아이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것. 조성 단계부터 아이들이 디자인 워크숍에 참여했다. 현장을 직접 걷고, 모형을 만들고, 역할을 나눠 자발적으로 의견을 냈다. 아이들의 요구는 구체적이었다. 그물형으로 타고 오르는 놀이시설, 여러 명이 함께 타는 그네와 모래놀이까지. 그물놀이터는 레고랜드 놀이기구를 본 아이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집라인처럼 현실적으로 반영이 어려운 의견은 조율됐지만, 아이들의 상상이 설계도의 출발점이 됐다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놀이터 한켠 현수막 에는 함께 만든 이들의 이름이 걸려 있다. 놀이터협의체, 디자인학교, 어린이감리단.
체육시간이 끝나갈 즈음, 아이들 얼굴에는 땀이 반, 흙먼지가 반 묻어 있다. 누군가는 “내일 또 여기서 체육하면 안 돼요?”라고 묻는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놀이터 안전지킴이가 아이들 곁을 지킨다.

‘별을 헤아리며’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성원초등학교 학생들
4월 3일 오후 2시 50분, 성원초등학교 4학년 5반 교실에 5·6학년 학생 14명이 로이스 로리의 소설 ‘별을 헤아리며’를 손에 들고 원형으로 둘러앉았다. 박미경 교수(한림대 영어교육 센터장)와 조성미 교사가 질문을 던진다. “여러분은 언제 두려웠나요?” 교과서 답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아빠가 화를 낼때. 낯선 사람이 뒤를 따라올 때. 책을 다 읽지 못해서. 작고 솔직한 두려움들이 원 안에 펼쳐지고, 아이들은 책 속 안네마리, 엘렌의 두려움과 나의 것을 천천히 비교해 본다.
그레이트북스(Great Books)는 미국 세인트존스대학의 고전 읽기 토론 프로그램에서 출발했다. 춘천시와 강원도특별자치교육청, 세인트존스대학의 협업으로 운영되며, 지자체와 대학이 함께 도시 단위로 그레이트북스를 확산하는 국내 첫 모델이다. 수업 방식은 단순하다. 같은 책을 읽고, 원형으로 앉아, 질문을 던지며 대화한다. 정해진 정답은 없고, 선생님도 답을 주지 않는다.
두 번째 수업인데도 아이들의 발언은 깊었다. 우윤이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의견을 듣고 배워서 책을 더 꼼꼼히 읽게 된다”고 했다. 다민이는 “혼자 읽을 땐 그냥 넘어갔는데, 질문을 받으니 계속 생각할 수 있게 된다”고. 채영이는 “지난 시간에 다빈언니가 안 네마리가 더 용기 있다고 했는데, 처음엔 제 생각과 달랐지만 동의 하게 됐어요. 선생님이 생각을 바꾸는 것도 용기라고 해주셔서 기뻤어요 ”라며 웃었다.
조성미 교사는 수업을 마치고 이렇게 소감을 전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이어 발화하는 이 수업은 남의 얘기를 들어야만 연결할 수 있어요. 보통 토론이라고 하면 논리와 논쟁을 떠올리는데, 그레이트북스는 경쟁이 아니라 따뜻하고 같이 성장하는 느낌이에요. 아이들이 협의하고 대화하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공감하고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배운 아이가 어떤 시민으로 자랄지, 그 답이 둥근 원 안에서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다.

4월 13일 월요일 오전, 춘천시청 지하 1층 재난안전담당관실 통합관제센터. 대형 모니터에는 춘천 시내 교량과 골목 화면이 가득하다. 소양강 위를 지나는 차들, 인적 드문 이면도로. 8시가 되면 그 사이로 학교 앞 화면들이 올라온다. 장학초, 신동초, 춘천초, 춘천계성학교, 춘천동원학교, 오동초. 담당자는 그 화면들을 번갈아 살피며 아이들이 교문 안으로 다 들어갈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 8시 40분쯤, 교차로를 건너는 학생들이 가장 많아지는 시간이 되면 시선이 모니터에 더 붙는다. 박동우 주무관은 “이 시간대가 제일 신경 쓰여요”라고 했다.
장학초는 2014년 10월, 춘천시 최초의 아동보호구역으로 지정 됐다. 아동보호구역은 아동복지법에 근거한다. 교통안전이 목적인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과 달리, 유괴·범죄 등 모든 위험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다. 지정되면 학교 외곽 반경 500m 안에 방범용 CCTV를 설치해야 하고, 시 통합관제센터와 경찰서, 학교별 안전지도 인력이 협력해 모니터링과 순찰을 맡는다.
이번에 새로 지정된 4개교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선정됐다. 장형순 시 아동정책팀장은 “경찰에서 각 학교 주변 위험 요소를 분석한 자료를 받아 검토하고, 학생 수, 통학 환경, 실제 사고 이력까지 저희가 직접 따져봤어요. 아이들이 매일 다니는 길이니까 꼼꼼하게 봐야죠”라고 했다. 신동초는 1,000여 명이 도보로 등하교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잡이 문제였고, 춘천초는 700여 명의 학생이 원도심 골목을 걸어 통학하는 환경이 위험 요소로 꼽혔다. 장애 학생들이 다니는 춘천계성학교는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옹벽과 수목에 가려 주변보다 어두웠고, 신북읍의 춘천동원학교는 외진 위치에 농로가 산재해 있어 실제 학생 배회 사례도 있었다.
이우찬 시 아동정책과장은 “CCTV나 순찰은 위험한 일이 생기기 전에 그 길을 안전하게 만드는 거예요. 아이들이 매일 걷는 길이니까요”라고 했다.

통합관제센터에서 아이들 등굣길을 모니터링하는 춘천시청 공무원들
지난해 12월 4일 오후, 춘천시청 지하 다목적회의실. 양복을 입은 어른들 사이로 교복을 차려 입은 아이들이 자리를 잡았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춘천시 아동참여단 단원들이다. 이날 안건은 2026년 어린이날 행사와 안전 통학길, 아동 복합문화공간 등 아이들의 일상과 직결된 정책들이었다.
아동참여단은 단순히 의견 제시를 넘어 도시 행사를 직접 설계한다. 지난 어린이날 행사 곳곳에 아이들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축구공을 차서 인형을 맞히는 부스가 있으면 좋겠다”는 제안은 강원FC와 협력한 ‘축구공 차기 부스’로, “소방관이나 과학자 같은 직업체험을 하고 싶다”는 의견은 실제 소방·과학 체험 프로그램으로 구현됐다. 춘천시 유튜브 홍보 부스 역시 아이들의 아이디어였다.
단원들의 활동은 어린이날 행사를 넘어 시정 전반으로 이어진다. 3·1절 타종식에 시장, 시의회 의장과 나란히 서고, 시의회 정례회 개회를 직접 방청하며 시정 곳곳에 참여했다. 이들의 제안은 구체적이다. “어린이날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방정환 편지 쓰기 활동을 넣자”거나 “컴퓨터 게임 대신 땀 흘리며 뛰어놀 수 있는 동적인 스포츠 체험을 늘려달라”는 등 어른들이 놓치기 쉬운 아이들만의 바람을 정책에 담아낸다.

아동참여단의 활동은 어린이날 행사를 넘어 시정 전반으로 이어진다.

아동참여단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어린이날 소방관 직업체험

제2기 춘천시 아동참여단 위촉식에 참석한 어린이들
시는 올해 어린이날 행사를 기획할 때 이날 나온 의견을 적극 반영할 예정이다. 장라영(15·우석중) 아동참여단장은 회의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그냥 형식적인 자리인 줄 알았어요. 근데 제가 ‘회의 시간을 5시 이후로 바꿔달라’고 했더니 진짜로 바뀌었거든요. 그때부터 ‘아, 우리 말을 듣고 있구나’ 싶었어요. 어린이 날 행사도 저희 의견대로 됐으면 좋겠어요.”
춘천시는 2027년 유니세프 아동친화도시 재인증을 목표로 아동 관련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아이들이 만든 놀이터에서, 누군가 지켜보는 등굣길에서, 아이들이 직접 앉는 회의실에서. 춘천이 약속한 어린이 수도는 지금도 만들어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