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섭 교수는 독립유공자 발굴에 힘쓴 공로로 춘천고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30년 넘게 사회부 기자로 현장을 누빈 김동섭(66) 한림대 객원 교수는 이제 취재 수첩 대신 빛바랜 판결문을 든다.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를 찾아 세상 밖으로 불러내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 6년 간 역사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영웅’을 재소환하는 작업을 해왔다.
기자 근성으로 시작한 ‘역사 취재’
그의 선친 김창요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서회 사건에 연루돼 평양에서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북한 자료를 확인할 수 없어, 김 교수는 사건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지 못한 채 아버지를 보내야 했다.
아쉬움은 다른 이들의 기록을 찾는 일로 승화했다. 춘천고등학교 선배와의 대화에서 새로운 작업이 시작됐다. 선배의 아버지는 항일 결사 조직 ‘상록회’ 구성원으로 옥고를 치렀으나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곧장 자료 수집에 나섰다. 기자 생활로 단 련된 추적 본능이 작동했다. 8개월간 집요한 조사 끝에 선배의 부친은 독립유공자가 됐다.
이를 계기로 김 교수는 국가가 미처 찾지 못한 영웅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춘천고를 시작으로 춘천농고(현 강원생명과학 고), 춘천사범학교(현 춘천교육대)를 거쳐 강릉, 양양 등 영동지역까지 발굴 범위를 넓혔다. 일제강점기 형사 조서와 판결문을 찾는 과정은 고된 노동이다. 특히 일제가 폐기한 1940년대 기록을 찾기 위해 다른 자료와의 연관성을 끈질기게 파헤쳤다. 지금까지 조사와 발굴을 통해 국가보훈부에 제출한 유공자 서훈 신청서만 220건에 달한다.

김동섭 교수
춘천고를 ‘항일 명문’으로 만든 집념
김 교수의 추적을 계기로 춘천고는 항일 운동의 성지가 됐다. 보훈부에 등록된 춘천고 출신 유공자 45명 중 20명이 그의 손을 거 쳤다. 모호한 심사 기준으로 탈락한 이들을 위해 자료를 여러 번 보완하는 과정도 있었다. 일본인 교사 집을 습격하고 재판정에서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학생들의 역사를 판결문 속에서 되살려냈다.
자녀가 없어 연락이 어렵던 박승간 씨 사례는 큰 보람을 남겼다. 수소문 끝에 형제에게 훈장이 전해졌다는 소식에 자신의 노력이 가치 있게 쓰였음을 느꼈다. 정부로부터 서훈 여부에 관해 직접 결과를 듣지는 못하지만, 연락 닿는 후손들의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가 그를 다시 움직이게 한다.
보상 없는 길, 사명감으로 걷는다
유공자를 밝혀내는 작업은 그에게 명예나 보상을 주지 않는다. 때로는 전공과 무관한 일에 시간을 쏟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독립 영웅 한 사람을 찾으면 판결문 속에서 또 다른 동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3·1 운동부터 학도병까지, 강원도의 독립운동사는 김 교수의 손끝에서 되살아난다.
김동섭 교수는 “누구 하나 칭찬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며 “나를 키워준 고향에 대한 보답이고, 스스로 느끼는 보람이면 충분하다” 고 했다. 그의 뒷모습에서 자꾸만 독립 유공자들의 얼굴이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