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 도시의 기준은 무엇일까. 화려한 프로구단의 연고지? 웅장한 전용 경기장의 유무? 그것만이 기준이라면 춘천은 ‘배구 불모지’라 불릴지도 모른다. 프로배구팀이 없고, 엘리트 선수를 육성하는 학교 운동부의 명맥도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선을 ‘생활체육’으로 돌리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해가 저무는 평일 저녁, 만천초와 성림초 체육관은 어김없이 환하게 불을 밝힌다. 배구화 바닥이 코트와 마찰하며 내는 날카로운 파열음, 동료의 이름을 부르는 힘찬 기합, 그리고 공을 살려내기 위해 몸을 던지는 사람들. 춘천은 그 어느 도시보다 뜨거운 ‘배구 심장’을 가진 곳이다. 불모지라는 편견을 보란 듯이 뒤집고 있는 춘천 배구의 생생한 현장을 들여다봤다.

춘천의 배구인들은 매년 춘천시장배 생활체육 배구대회에서 실력을 겨룬다.

춘천의 배구 생태계는 행정이나 기업 주도가 아닌, 시민들의 자생적인 열정으로 구축됐다. 춘천시배구협회에 등록된 클럽 수만 해도 13개에 달한다. 인구 대비, 전문적인 배구 인프라가 부족한 환경을 고려하면 놀라울 정도의 밀도다.
현재 정회원 클럽 8개 팀(세이버스, 춘천비바, 썬더히어로, 레이커스, 썬더나인, 블랙이글스, MC위너, 춘천남자실버부)과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준회원 클럽 5개 팀(강원대·춘천교대·한림 대)이 리그를 소화하고 있다. 동호인 수는 약 200명. 코로나19 이 후 많은 생활체육 종목이 위축됐음에도, 춘천 배구는 3년 사이 신 규 클럽이 2개나 창단될 만큼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배구의 규칙은 간단하다. 3번의 터치 안에 네트 반대쪽 상대 진영으로 공을 넘겨야 한다. 그 안에 공을 넘기지 못하면 실점한다. 상대가 서브하면 리시브로 공을 받아, 토스로 공을 올리고 공격한다. 생활체육에서 즐기는 ‘9인제 배구’는 한 팀의 선수 9명이 고정 위치에서 경기한다. 프로배구에서 채택하는 6인제 보다 긴 랠리와 팀 협업을 중시한다. 네트 높이가 낮아 초보자도 즐기기 적합한 운동이다.

이들이 즐기는 배구는 프로배구(6인제)와 달리 ‘9인제’로 진행 된다. 많은 인원이 동시에 경기에 참여할 수 있어 함께 즐기는 생활체육의 취지에 제격이다. 수비 간격이 촘촘해 1인당 커버해야 할 면적이 줄어들기 때문에, 동호인들도 체력 부담을 덜 느끼며 경기를 이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코트 안에서는 국경과 세대도 사라진다. 20대 대학생의 패기와 60대 실버부의 노련미가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맞붙는다. 일본, 우즈베키스탄 등 외국인 이웃들도 공 하나로 언어 장벽을 넘어 ‘원팀’이 된다. 춘천에서 배구가 단순한 운동 모임을 넘어, 사회 통합의 장(場)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방증이다.

춘천 배구 동호인들의 실력은 정평이 나 있다. 조직적인 전술과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팀들이 많다. 그 비결은 춘천 땅에 흐르는 ‘배구 명문의 역사’에 있다. 과거 춘천은 유봉여고 배구부와 1980~1990년대 대학 배구를 호령한 강원대 배구부가 있었던 ‘배구 도시’였다. 엘리트팀 규모는 축소됐지만, 그때의 주역들은 춘천을 떠나지 않았다. 선배 배구인들이 생활체육인들의 멘토를 자처했다.
이들이 전수하는 기술과 경기 운영 노하우는 시민의 열정과 만나 상승효과를 냈다. 춘천시 대표팀은 2024년 제32회 강원특별자치도민생활체육대회 남자부 단체전 준우승을 거뒀다. 지난해는 기세가 더 확장돼, ‘블랙이글스’ 클럽이 강원 종별 배구선수권 대회에서 여성부 3위에 올랐다. 제60회 강원특별자치도민체육대회에서도 춘천시 대표팀 여성부가 3위에 입상했다. ‘시민 선수’ 들이 춘천 배구의 자존심을 단단히 지키고 있는 셈이다.

춘천시배구협회 소속 클럽 회원들은 올해 1월 호반체육관에서 열린 V-리그 올스타전에서 봉사활동에 나섰다.

배구는 ‘희생’의 스포츠다. 자신을 위해 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동료가 공격할 수 있도록 공을 받아내고(리시브), 올려주는(토스) 이타적인 플레이가 필수다. 춘천 배구인들은 이러한 스포츠 정신을 지역 사회 봉사로 확장했다.
1월 25일, 호반체육관에서 열린 ‘2025~2026 V-리그 올스타 전’의 성공적인 개최 뒤에는 춘천 배구 동호인들의 숨은 땀방울이 있었다. 각 클럽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12명의 봉사단은 축제의 조연을 자처했다. 전경숙 춘천시배구협회 전무이사가 장비 매니저로, 이기호 전 전무이사가 코트 매니저로 나서 현장 실무를 도맡았다. 이들은 네트 설치부터 경기장 바닥 청소, 장비 점검 등 가장 고된 곳에서 묵묵히 움직였다. 배구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뭉친 이들의 헌신 덕분에, 춘천을 찾은 전국의 배구 팬들은 쾌적한 환경에서 경기를 즐길 수 있었다. 춘천이 진정한 ‘배구 도시’임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춘천 배구는 더 큰 도약을 준비한다. 춘천시배구협회의 올해 목표는 동호인들이 날씨와 대관 걱정 없이 운동할 수 있는 체육관 인프라를 확충하는 것이다. 안정적인 공간이 확보되면 대규모 대회를 유치해 지역 경제와 스포츠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구상이다.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무대도 넓어졌다. 올해 처음으로 ‘2026 춘천시 종목별 리그전 배구대회’가 신설됐다. 단발성 행사가 아니라 연중 4회 이상 리그 형태로 진행된다. 매년 10월 열리는 ‘춘천시장배 배구대회’까지 더해지면, 시민들은 1년 내내 배구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된다.
“배구는 9명이 하나가 되어 공을 떨어뜨리지 않는, 끈기와 화합의 스포츠입니다. 춘천 배구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전경숙 전무이사의 말처럼, 프로팀의 유무가 도시의 스포츠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퇴근 후 체육관으로 향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한, 춘천은 그 어느 곳보다 비옥한 ‘배구의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