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호암 이준용·수암 한용섭 선생 기념비. 이준용 선생이 옥중에서 지은 시가 왼쪽에 음각되어 있다.
‘땅은 내 땅이로되 나라를 잃었으니 주인은 나그네 되고 나그네는 주인 되었네.
내 모든 것 혼을 부어 자주 독립 밑거름하니 광복의 그날이 오면 춤을 추세 춤을 추세’
서면 금산리(강원애니고 옆) 박사마을선양탑 뒤 언덕에 세워져 있다.
삼월의 화사한 햇살을 따라 봄은 어김없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어쩌면 봄의 전령사인 생강나무는 이미 노란 꽃눈을 틔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삼월이면 봄꽃 향기보다도 먼저 다가오는 가슴속의 울림과 격정. 만세! 대한민국 만세! 태극기의 물결과 만세 소리로 지축을 흔들던 3·1절의 함성이 먼저 떠오른다. 우리나라 4대 국경일의 하나인 3·1 절이 올해로 99주년을 맞았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독립선언서를 1919년 발표하면서 들불처럼 번져나간 만세운동. 비록 많은 상처와 피해를 남기고 좌절되었지만, 한국의 자주 독립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평화적 의거(義擧)의 날이다. 기록에 의하면 1919년 1월 고종 승하 후 한양(서울)에서는 40일장의 장례일인 3월 3일에 맞추어 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2월 말경에는 각 지방으로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배포되고 있었다.
파고다 공원과 아우내 장터에서 목이 쉬도록 외치던 격정의 ‘만세’소리가 전국적으로 소용돌이치던 그때 우리 춘천은 어땠을까? 사실 춘천의 만세운동은 타 지역에 비해 사료도 부족하고 자랑할 만한 실적도 미약하다. 하지만 우리 지역 여기저기에서도 소규모의 만세운동이 있었다.
일제 경찰의 삼엄한 감시 피해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당시 춘천은 구한말 을미의병의 본거지였고 도청 소재지로 일제 관청이 집중되어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일제 경찰의 감시망과 경계가 유독 심했다.
또 국도나 철도가 없어 우마(牛馬)나 북한강 수운 그리고 도보로 교통망이 형성된 곳이라 독립선언서 전달도 쉽지 않은 여건이었다.
한양에서 춘천으로 독립선언서 직접 전달이 어렵자 지금의 북강원도인 천도교 평강교구를 통해 3월 4일 독립선언서 150매를 보내지만 운반요원이 일제의 불심검문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 고장에서는 천도교 춘천교구장 이준용과 윤도순 박순교 선생이 3월 중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도순이 체포되는 바람에 중단된 상태였다.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춘천의 헌병과 수비대에서는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장터와 주요 길목을 지키며 더욱 삼엄한 경계를 폈다.
1919년 3월 28일, 이준용은 춘천읍 요선장날에 맞춰 집에서 가족들과 싸리나무대로 태극기를 만들고는 "다시 집에 못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비장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박순교, 허기준과 함께 태극기를 감추고 장터로 잠입하여 천도 교인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독립선언서가 사전 압수된 뒤 좌초 위기 끝에 나온 만세 소리였다. 비록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지만 요선장터 만세운동은 일제의 방해와 억압 속에서 일궈낸 매우 값진 성과였다. 사북면 오탄리에서는 이교관, 김공모, 최기항이 태극기와 선전문을 만들다가 붙잡혀 가기도 했다.
강원도청 앞 옛 시민회관 자리에 세워진 기념비
‘여기는 춘천시민회관이 자리했던 터로서 일제강점기 춘천 3·1만세 시위의 본거지였던 요선 시장과 인접한 곳이기도 합니다’
라는 문구가 가로형의 검은 비석에 새겨져 있다.
독립투사 이준용·한용섭 선생 추모비
1970~80년대
서면 방동리 입구 도로변에 있었다.
기념비에서 다시 찾는 삼일 만세운동의 흔적
이제 3월을 앞두고 그 흔적을 찾는다. 대규모 만세운동이 없어선지 변변한 기념물도 없지만 곳곳에 당시의 정기(正氣)가 서려 있다. 그중 서면 금산리에 있는 이준용과 한용섭 선생의 기념비와 도청 앞 옛 시민회관 터에 있는 요선장터 만세운동을 소개한 표석을 둘러본다.
서면의 기념비에는 만세운동으로 투옥돼 감옥에서 환갑을 맞은 이준용 선생의 옥중시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말미 에 찍은 수인에서는 그의 기개가 느껴질 정도다. 이준용 선생은 1920년 출옥 후 교육 사업을 하다 안타깝게도 해방을 몇 달 남기고 생을 마친 분으로 1992년에 건국훈장애족장에 추서됐다.
사북면 출신의 한용섭 선생은 홍천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총상을 입고 서면 방동리로 피신, 정착했으나 역시 광복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비운의 독립 운동가이다.
처음에는 1975년 천도교 춘천교구와 주민들이 방동리 입구 도로변에 이분들을 위한 작은 추모비가 있었으나 노후돼 없애면서 1990년 8월 당시 춘성군에서 춘천교대 이길종 교수에게 의뢰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했다. 이후 도로 확장으로 지금의 자리(애니고등학교 옆)로 이전한 것이다.
도심에는 춘천시가 2008년 도청 앞의 낡은 시민회관 건물을 철거하고 시민공원을 조성하면서 이 일대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자 한 표석이 낮게 세워있다. ‘일제강점기 춘천 3·1만세운동의 본거지였던 요선시장과 인접한 곳’이라는 글이 눈에 도드라지게 들어온다.
역사란 지나간 시간에 드러났던 외형적 기록뿐만 아니라 그 시간의 흔적을 기록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때 다른 민족의 침략 아래 굴욕의 기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며 일어났던 힘찬 역사였음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3·1운동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굴하지 않는 자존심을 만방에 알린 아름다운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날의 뜨거웠던 만세의 함성을 떠올리며 역동적인 삼월을 맞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