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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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26

2018.3
#봄내를 품다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 15
그린벨트 전면해제
개발족쇄 그린벨트 29년 만에 전면해제

오랫동안 봄내골을 옥죄어 개발의 족쇄가 되어 왔던 그린벨트(Green Belt. 개발제한구역)가 지난 2002년 전면해제됐다. 엄격하게 개발을 제한하는 그린벨트가 지난 1973년 지정된 지 실로 29년 만이다. 그동안 그린벨트에 묶여 온갖 불편을 감내해 와야 했던 봄내골 주민들이 ‘전면해제’의 반가운 소식을 듣고 환호성을 터트린 지도 벌써 16년이 흘렀다.




춘천지역 그린벨트 거주 주민들은 춘천시립문화관에서 그린벨트 해제 촉구 결의대회를 갖고 도청 광장과 중앙로 로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1995.3)




국토의 난개발 막으려는 고육지책


그린벨트 제도는 1930년대 영국에서 처음으로 시작됐다. 대런던계획에 따라 시가지 주변에 설정한 것이 근대적 개념의 그린벨트 효시이다. 도시와 도시 사이가 서울과 부천 인천처럼 도로연변 만이 무질서하게 잇따라 난개발되고, 녹지가 훼손되는 사태를 막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차단(遮斷)녹지대’라고 불렀다. 이후에 매스컴이 개발을 제한한다고 해서 ‘개발제한구역’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71년 서울지역이 처음으로 지정됐다. 개발연대에 우후죽순처럼 팽창하는 도시화 물결을 더디게 만들고 주변의 녹지 공간 확보와 자연환경을 보존하자는 취지였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일부 지역을 필두로 그린벨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전국 각 시·도 도시권으로 확대됐다.

이런 과정에서 지정된 춘천권역 그린벨트는 중앙로 로터리를 중심으로 반경 5~12㎞ 이내로 지정됐다. 중앙로 로터리에 컴퍼스 중심을 꼽고 원을 그려 반경 바깥쪽이 81㎞, 안쪽이 73㎞의 길이였다. 도농통합 이전이라 춘천시 지역이 12㎢, 춘성군 지역이 282㎢로 총면적이 294㎢에 이르렀다.


지정고시 이전에 춘천에 내려와 준비 작업을 주도해온 당시 건설부 직원들은 드러내 놓고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지도 못했다. 그 결과 자치 단체가 다듬어 온 도시계획과 관광개발계획에 상충되거나 집단취락이 포함되고, 많은 주민들이 생업마저 위협받게 짜였다.

당사자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행정예고 같은 절차도 없이 밀어붙여졌다. 주택지나 공장용지를 만들거나 기타 지정목적에 어긋난 자연개조 행위를 막으려는 국가 차원의 의지나 조치가 강력하고 구체적으로 이뤄지면서 주민들이 아연실색하게 되었다.




필자가 춘천시청 출입기자 시절 쓴 <춘천 그린벨트 지정> 기사(강원일보 1973년 6월 27일자). 이후 그린벨트 지정의 허와 실을 분석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사설과 특집 기사가 봇물을 이뤘다.



규제강화로 ‘신성불가침 영역화’


봄내골 앞날에 가져올 충격의 파장은 예상보다 엄청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지역의 초기 반응은 오히려 밋밋한 감이 없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이뤄지던 자연보호운동쯤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중요시하는 지역 특유의 기류 때문이었는지 즉각적인 반대나 강한 거부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겉으로 심드렁했지만 “법은 그렇더라도 대물림하면서 살아온 땅인데 심한 단속의 손이 미치겠나”라고 가볍게 여기는 기류였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지정→고시→시행→단속으로 이 어진 정책이 촘촘하게 실체화되면서 지역의 반응이 하루가 다르게 싸늘하게 식어 갔다. 우선 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팔거나 개발하는 것이 제한을 받게 됐다. 이미 그 안에 지어진 집이나 각종 시설물이라고 하더라도 개량과 증축 등에 여러 가지 제약이 뒤따랐다. 살던 집이 낡고 무너지거나 자식을 분가시키려고 해도 새집을 짓 거나 늘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고장에서 대물림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시절 다른 지역은 개발호재로 땅값이 폭등해 떵떵거렸던 시기였다. 개발이 묶여 있어 땅을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자 덩달아 지역 발전과 경제도 얼어붙고 위축됐다.


국가의 장래를 위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삼아 그린벨트를 지키려는 검찰·경찰 등 사직 당국의 준법의 지는 하늘을 찔렀다. 항공촬영으로 구석구석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형질변경과 불법 시설물 등 위법사실이 드러나면 즉각 적발해 의법 조치가 이뤄졌다. 절 앞에 길을 넓힌 주지가 구속되고 산사태로 무너진 석축을 쌓아 올린 주민과 외양간을 고치고 비닐하우스와 양어장 관리사를 지은 사람들이 줄줄이 적발됐다. 심지어 농장관리사를 지을 수 없어 폐차된 버스를 들여놓았던 농장주와 새로 지은 화장실까지 철거되는 수난을 겪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규제의 고삐는 느슨해지기는 커녕 점점 커지고 거세져 갔다.



▲허물어져 가는 축사였지만 그린벨트에 묶여 증개축을 할 수 없었다.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 몫이었다. (1993.3)


당시 고병우 건설부 장관(오른쪽 두 번째)이 24일 춘천을 방문, 함종한 강원도지사의 안내로 삼천동 하사관 부락 일대의 그린벨트 지역을 돌아보고 있다. (1993.7.24) 



시립문화관에서 춘천지역 그린벨트 해제 촉구 결의대회에 모인 참석자들이 그린벨트 해제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1995.3)



정치권 이슈화로 ‘해제의 닻’ 올려


중앙로 로터리를 중심으로 5㎞ 이내까지 저촉되고 그 둘레를 그린벨트가 둘러싸 “도대체 어디가 개발이 가능한 곳이냐!”는 항변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가뜩이나 상수원보호구역, 녹지대, 군사시설보호구역 등 이중 삼중으로 묶여 불편을 겪어오던 참이라 불만의 소리가 해마다 커져갔다. 그러면서 춘천권역의 그린벨트 해제는 전국의 어느 곳보다 가장 시급한 현안 중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춘천권역 그린벨트에는 지정 이후 전면 해제되기 직전까지 4,563가구에 1만5,902명의 주민이 살았다. 30%의 땅을 소유하고 있던 외지인들이 언제 풀어줄 거냐는 볼멘 목소리까지 터져 나왔다.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규제에 짓 눌려 있던 주민들의 항변이 줄을 잇고 건설부에 민원이 봇물을 이뤘다.



춘천시 강남동 주민들이 삼천동 거리공원에서 그린벨트 해제를 자축하는 마을잔치를 열고 지역 개발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2001.12.24)


지역 언론들도 활자나 전파할 것 없이 주민들이 겪고 있는 답답함과 불편사항을 특집과 기획기사로 대서특필하고 대변하기 시작했다. 그린벨트의 허(虛)와 실(實)을 파헤치고 해법의 가닥을 제시하는 기사가 연중 이어졌다. 집단 항의 사태도 이어졌다.


하지만 굳어진 ‘선(線)의 장막’은 걷힐 줄 몰랐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더 이상 버티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대통령 선거나 지방선거를 치를 때마다 그린벨트 조정 문제가 단골 이슈로 제기됐다. 그때마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끝나 정치적 수사(修辭)에 그치기 십상이었다.


정치권이 주민들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는 5·6공화국을 거치는 동안에는 달라졌다. 정치권이 앞장서 규제조치 완화에 나서기 시작했다. 도시계획법시행규칙을 마련(1990년 10월)해 주민생활의 불편사항을 제거해줬다. 생업시설 여가와 휴식공간으로 활용토록 하고, 공공건물과 체육시설 등 건축물의 신·증축을 허용할 수 있도록 획기적으로 규제를 대폭 풀었다.


이어 근린시설 신축을 허용(1999년 6월)하면서 춘천권 역을 비롯한 청주, 전주, 여수, 통영, 진주, 제주 등 7개 중 소도시 그린벨트가 전면해제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그리고 3년 후인 2002년 봄내골 사람들이 그렇게 열망해 오던 ‘전면해제의 닻’이 올려졌다.





보존 · 개발의 조화가 미래의 관건


훌륭한 정책이라고 언제나 좋은 결과가 따르는 것은 아니다. 나쁜 정책도 마찬가지이다. 항상 반대급부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섣부른 판단과 결정으로 빚어낸 족쇄였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지만 지역에 안겨준 긍정적인 점도 없지 않았다. 무질서한 난개발이 이뤄지던 시절 녹지를 보존하고 도시의 과도한 팽창을 억제할 수 있었다. 투기 바람을 잠재워 아름다운 호반과 전원도시로서의 풍광을 지켜왔던 고육지책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봄내골은 광역자치단체인 강원도의 엄연한 수부(首府) 이다. 주변을 산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여서 과도한 도시 팽창이 어려운 곳이다. 그럼에도 다른 도시와 견줘 유별나게 더디게 발전해온 요인은 여전히 정부 정책이 소외와 개발억제 정책에 쏠려 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시나브로 그린벨트 전면해제 조치가 이뤄졌다고 봄내골 주민들의 답답한 마음이 말끔히 가신 것은 아니다. 아직도 동반성장의 호기를 잃어버리게 만든 상수 원과 군사시설보호구역 등 규제의 사슬과 ‘무접대론’이 냉기로 서려 있다.


모름지기 ‘역사는 스스로 선택하고 준비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했다. 그린벨트 전면해제에 이은 옛 캠프페이지 환수조치로 그동안 침체됐던 봄내골이 새로운 모멘텀 (Momentum)을 맞고 있다. 덩달아 교통, 환경 등 주변인 프라가 발전 잠재력을 키워 봄내골의 미래를 한층 밝게 하고 있다.

정부도 이제는 자연환경 훼손이 우려되는 땅을 토지협의매수제도를 통해 직접 사들여 일방통행식 시책 시행을 근절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린벨트 지정의 아픔을 거울삼아 알찬 미래를 향한 보존과 개발의 야무진 조화를 엮어낼 지혜가 그 어느 때 보다 긴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