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로 오래 살다 보니 담임-학부모로 알게 되었다가 아이가 자라면서 형님, 아우로 지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장터에 나갔다가, 또는 동네 편의점에서 이들과 마주치면 막걸리 회동(?)도 하지요.
아이 이야기를 주로 나누니 공부 이야기도 하게 마련입니다.
그 중엔 긴 대화로 이어지는 분도 있는데, 온달이 아빠처럼 자식 공부에 열정적인 부모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공부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머리 좋고 성실한 온달이. 이런 아이를 키운다면 늘 웃음이 떠나지 않을 것 같은데 절 보자마자 한숨부터 쉬더군요. 수능이 낼모렌데 온달이 성적이 더 안 오른다면서.

- 온달이 공부 잘하잖아. 9모(지난 9월에 치른 모의고사)에서 전 영역 일 등급이라고 들었는데?- 아유, 춘천에서 그 정도론 안 되쥬.
- 온달이 정도면 아주 잘하는 편인데?
- 조금만 더 하면 전교 일 등 할 것 같은데. 애가 요즘 긴장이 풀렸는지 영 안 하네요.
- 아, 전교 일 등 원하는구나?
- 학교 뒤에 사는 영길이 아빠 아시죠? 저처럼 소 키우는.
걔 딸내미 작년에 의대 붙었잖어요. 그 집 완전히! 잔칫집 분위기잖어요. 제가 소 키우고 장사하니까 봐주지도 못하고 그래서 온달이 성적이 안 오르나 그런 맘도 들어요.
못사는 집 애들이나 받는 장학금 받고 다문화 소리 들으며 사는 것보다는 공부라도 잘해서 여봐란듯이 대학에 척척 붙고 취직도 잘하면 좋죠. 안 그럼 지도 나처럼 살 거 아니래요?- 너처럼 살까 봐 걱정되는구나. 너처럼 사는 게 어떤 건데?
- 에이, 안 좋쥬. 이렇게 살면 뭐 해요.
- 이렇게 사는 게 어때서?- 형님도 아시잖어요. 제가 어떻게 사는지.
- 알지만 너처럼 사는 게 뭐가 나쁜지 잘 몰라서 그래.
- 아유, 소나 키우다가 장가도 못 가다가 이 나이에 겨우 온달이
하나 낳았잖어요. 이런 가정에서 사는 애가 행복하겠나 싶네요.
- 온달이가 그러디? 아빠가 가난해서 소나 키우다가 장가도 못 가서 늦은 나이에 자기를 낳아서 불행하다고?- 아유, 온달이가 그런 말은 안 허죠. 지 엄마를 얼마나 끔찍이 위하는데요.
- 그럼, 왜 그러는데?
- 그냥요. 제 마음이 그렇죠.
- 그럼 온달이가 아니라 네 마음이 힘든 거네.
- 좋은 대학 나오면 좋은 직장에 가고 장가도 잘 가고 행복하게 살 수 있잖어요.
- 좋은 대학 나온 사람 모두 행복하게 살디?
- 뭐 대개 그렇지 않겠어요?
- 대개 그런 거 말고. 그래서 잘 사는 사람이 많나 궁금해서.
- 인터넷 봐도 그렇잖어요. 서울이나 뭐 강남 부자들이 그래서 지 자식들은 공부 죽어라 시키잖어요. 부모는 못 배워 멸시받고 살았어도 자식 하나 보구 쎄가 빠지게 일하는데, 자식이 출세해서 은공을 알아주면 얼마나 좋아요?
- 온달이가 공부 잘해서 그동안 아빠가 고생한 거 다 보상해 주면 좋겠구나? 근데 그건 네 몫이잖아. 온달이에게 떠넘기지는 마.
키워줬으니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도 접어.
온달이 아빠로 살면서 받은 멸시가 있다면, 온달이가 보상해 줄 걸 기대하지 말고 너 혼자 극복해. 수능이 코 앞인데, 안 그래도 힘든 애 닦달하지 말고, 지금의 온달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걸로도 넌 행복할 수 있잖아.
그게 온달이를 더 성장시키는 선물일 거 같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