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사랑 이야기가 가장 재밌다. 아이들은 예전만큼 선생님의 첫사랑을 궁금해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에 관심이 많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10대 중반이었고, 춘향과 몽룡도 그랬다. 아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면 괜스레 같이 가슴이 콩닥거린다.
태준_ 쌤, 사랑이 뭘까요?
나_ 응, 사랑? 훗, 드디어 그것이 궁금해질 때가 왔구나.
태준_ 오늘 하루 종일 애들이랑 얘기했거든요. 사랑이란 뭘까.
나_ 아침부터 모여서는 그렇게 진지하게 떠들어대더니 사랑 얘기한 거구나. 그래서 결론이 났어?
태준_ 네. 사랑은 한가지 감정으로만 이루어진 건 아닌 거 같아요.
여러 가지 감정의 복합체랄까? 근데 감정도 본능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이건 애들도 다 동의한 거예요. 그렇다면 본능에서 나오는 감정의 복합체인 사랑도 결국 본능인 걸까, 하는 의문이 든거죠.
나_ 그러게. 사랑도 본능일까?
태준_ 사랑은 인간이 인간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감정이잖아요?
뭐든 다 해주고 싶고, 내가 져주고 싶고. 저도 이루한테 맨날 지거든요. 근데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란 말이죠. 그게 본능이고.
쌤 원래 제 성격 아시죠? 근데 이루는 이길 수가 없거든요. 아니, 져주는 거죠.
나_ 응. 복도에서 가끔 보면 너 맞고 있더라.
태준_ 그래서 사랑이란 본능에서 나오는 감정은 맞다, 하지만 본능에만 따르지 않고 이성적 판단으로 그걸 거스르며 지속적으로 유지 가능한 감정이다. 이런 결론을 내렸어요. 사랑의 정의는 아니지만 사랑의 특징을 찾은 것 같아요.
나_ 오, 맞네. 이성과 본능의 절묘한 조화, 순간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감정.
태준_ 기분이 아주 좋아요. 답을 찾아서.
나_ 축하한다. 그나저나 넌 언제부터 이루랑 만난 거냐?
태준_ 제가 중학교를 이루랑 같이 다녔거든요? 근데 이루가 예쁘잖아요. 그래서 중2 때부터 혼자 몰래 좋아했는데 관심받으려고 장난도 치고 앞에서 계속 알짱거렸어요. 근데 얘는 모르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걸.
나_ 그래? 좀 더 티를 내지 그랬어.
태준_ 그러다가 방학이 돼서 천안 할머니 댁에 갔어요. 한 3주쯤인가. 그런데 갔다 와보니 얘가 남자친구가 생긴 거예요! 근데 더 충격인 게 제가 진짜 싫어하는 애가 있었거든요. 걔랑 사귄다는 거예요.
나_ 헐, 힘들었겠네. 그러게 왜 그렇게 오래 갔다 왔어.
태준_ 암튼, 그때 되게 방황했어요. 공부도 안 하고, 세상이 다 미워지고.
나_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 있지.
태준_ 그러고 있는데 이루랑 걔 남자친구랑 저랑 고등학교도 같이 온 거죠. 와, 진짜 맘 정리 다 했는데
나_ (놀라며) 그럼 지금 이 학교에 같이 다닌다고? 누군데? 나도 알려줘.
태준_ 아, 있어요.
나_ 아, 쌤도 좀 알자.
태준_ (주위를 둘러보며 작은 목소리로) D.
나_ 뭐? 지금 같은 반이잖아? 참, 운명의 장난이네.
태준_ 그러니까요. 암튼 고등학교 왔는데 조금 있다가 걔네가 헤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건 마지막 기회다 싶은 거죠.
나_ 아직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구만.
태준_ 그리고 수학여행을 갔어요. 진짜 3박4일 동안 걔 옆에 계속 붙어 다녔죠.
나_ 오. 그래서 성공한 거야?
태준_ 네. 결국 마음을 얻었죠. 훗. 전 이루랑 평생 사랑할 거예요.
사랑이 뭔지 알았으니까.
나_ 그거, 이루도 동의하는 거냐?
태준_ 아직 모를걸요.
얼마 전 수행평가로 받은 이루의 글이 생각났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지. 날 생각해 주는 마음에 눈물이 났다.”
이 문장에 이런 이야기가 숨어있었군. 며칠 뒤 복도를 지나가는 이루를 만났다.
나_ 이루야, 너 얼마 전에 수행평가로 낸 글 있잖아. 혹시 그거….
그 사람한테도 보여줬어?이루 아, 아니요. 안 보여줬어요.
나_ 왜? 너무 예쁘고 선한 마음이라 알려줘도 좋을 것 같던데.
이루 그냥요. 제 마음이니까 저만 알래요.
서로를 가장 애틋하게 사랑하면서도 아직 다 보여주지 않은 사랑이 여기 있다. 어쩌면 어른보다 순수하고 성숙하다.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흘끔 바라보다 눈 마주치면 발개지는 얼굴, 고생하는 부모님을 이야기하며 글썽이는 눈매, 어제 한바탕 혼나고서 선생님에게 쓰는 장문의 사과 편지. 모두 아이들이 가진 사랑의 모습이다. 아이들에게서도 배울 사랑이 많다.
역시, 사랑 이야기가 제일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