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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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17

2025-10
#최돈선의둘레마을이야기 #봄내를품다
최돈선의 둘레마을 이야기 34
리코더 마이스터 조진희
시인 최돈선이 바라본 마을 그리고 사람 이야기


- 주인 없는 방

춘천예술촌 창작1호관 출입문은 열려 있다. 이 공방의 주인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살그머니 유리문을 밀고 들어선다. 안은 고요하다 못해 고적하다. 흡사 절간 같다. 주인 없는 방은 갑자기 틈입한 사내로 하여 숨을 죽인다. 나는 도둑처럼 이곳저곳을 살핀다.



두 개의 널찍한 방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리코더 제작도구와 작업대, 의자, 완성품인 진열대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

갖가지 끌과 사각형 나무들, 깎다 만 형태의 리코더들, 이름 모를 기계와 도구들이 널려있는 속에서 나는 한 예술인의 고독한 작업을 상상한다.

구석진 한 곳에 사진 액자 하나를 나는 발견한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스승 야마우까 님과 찍은 사진이라 했다.

방안을 대충 살펴본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한 십여 분 지나서 턱수염의 마이스터 조진희 님이 마법처럼 나타나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문간으로 들어선다.

이렇게 하여 나는 고음악의 이야기 세계로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 9월 5일 밤은 아름다웠다

그날 밤 거두리성당엔 조용히 귀 기울이는 청중들로 가득 찼다. 연주는 너른 성당을 메아리처럼 울렸다. 별도 없는 밤이었음에도 나는 생멸하는 별들의 반짝임을 보았다. 그리고, 숨죽여 바흐와 비발디와 텔레만의 음악을 들었다.

9월 5일 그날은 ‘카메라타 춘천’이 첫 고고성을 울리는 날이었다.

춘천은 국제 고음악축제의 도시이다. 그동안 30여 년을 외지나 외국 공연단체 위주로 축제가 진행되었다. 세월이 흘러 춘천은 젊고 역량 있는 클래식 음악인들로 고음악의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뜻이 모이고 화음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춘천고음악단 ‘카메라타 춘천’이 창단되었다.


9월 5일 거두리 성당에서 열린 ‘카메라타 춘천’ 공연 모습


전날 ‘바흐와 동료 거장들의 고음악 앙상블’에 이어, 이튿날은 리코더 앙상블로 ‘르네상스와 바로크’가 진행되었다. 전날의 감동이 전해졌는지 세찬 비를 뚫고서 청중들의 발걸음이 거두리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조진희 예술감독도 단원들도 청중의 박수소리와 바깥의 빗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이며 깊은 감동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저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고음악과 리코더의 삶

“리코더는 제 삶 그 자체입니다.”

이 말은 젊은 날을 국제고음악축제 예술감독을 맡아 헌신해 온, 조진희 님의 진솔한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조진희는 리코더가 좋았다. 리코더만 있으면 들녘이든, 냇가든, 골목이든, 숲속이든 그 어디이든 소년 조진희는 마법의 소년처럼 리코더를 불었다. 지금의 어린이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악기로서 리코더를 불고 있듯이.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에 나오는 아홉 살 소녀 은희는 바로 우리 동심의 모습이다. 그만큼 리코더는 우리에게 친숙한 악기로 사랑을 받는다.


조진희는 강원대 음악교육과를 졸업하자마자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다. 1993년 빈 국립음대를 졸업하고 이듬해 빈 시립음악원 앙상블 지휘과를 졸업했다.

그간 독집 CD도 5집을 출간했다.

오스트리아 빈, 미국 시애틀, 일본 도쿄, 타이완을 순회하며 십수여 회의 독주회를 가졌다.

그러나 조진희에겐 향수병이 나날이 깊어져 갔다. 고향의 냇가, 골짜기, 들녘의 냄새가 그리웠다.



조진희 리코더 마이스터


- 춘천살이와 춘천고음악제

이윽고 1994년 귀국한 조진희는 생기와 힘을 얻었다. 조진희는 여기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달았다. 13년 동안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 출강하면서 춘천국제고음악제를 이끌었다. 1회에서 17회까지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젊음을 고스란히 고음악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2003년부터 오른쪽 귀에 난청이 왔다. 음악가로선 치명타였다. 베토벤은 20대 후반에 난청이 오자 충격을 받아 1802년 동생에게 비통한 심정의 유서를 남긴 적이 있었다.


춘천국제고음악제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던 2011년 모습


조진희는 일본의 유명한 리코더 연주자이며 리코더 제작자인 야마우까 선생을 찾아갔다. 귀가 먹었으면 연주를 할 수 없을 터이니 좋은 리코더를 만들어 보급해 보자는 마음에서였다. 야마우까 선생은 흔쾌히 조진희를 받아주었다.

절망 속에서 오른쪽 귀는 이제 완전히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진희는 야마우까 선생에게 리코더 만들기를 열심히 배웠다. 몇 년 뒤 조진희의 리코더는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훌륭한 연주자들이 조진희의 리코더를 사용하여 연주하기 시작했다. 조진희의 불완전한 ‘한쪽 귀만으로의 연주’도 어느덧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한쪽 귀의 막힘을 마음으로 들었다. 그의 연주는 특색있는 음색으로 더욱 자유로웠다.


조진희 마이스터가 제작한 수공예 리코더들


- 소리의 아름다움은 마음에 있다

한동안 조진희는 춘천을 떠나 있었다. 그러나 양평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공방에서의 리코더 제작일도 코로나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양평에서의 활동은 오랜 동면冬眠에 접어들어야만 했었다.

그러던 중 춘천시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다시 춘천으로 오시라고.

춘천예술촌을 건립 중이니, 그곳에 와서 연주 활동도 하고 공방 일도 계속하시라고.

솔깃했다.

물 떠난 물고기는 살 수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그만큼 춘천은 자신에겐 생명의 물이나 다름없었다.

제1호관.

그곳이 그의 공방이었고 연습실이었다. 고마웠다. 고향은 늘 자신을 감싸 안았다.


- 어린이도 시니어도 모두 다 뚜뚜뚜

이제 조진희의 공방은 호기심 많은 어린이와 귀 기울이는 노인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뚜뚜뚜 뚜뚜뚜, 조진희의 공방은 플류트와 리코더를 부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다.

요즘 시니어오케스트라를 만드는 일에 조진희는 아주 열심이다. 놀랍게도 노인들이 더 열심이고 적극성을 발휘한다. 조진희는 그래서 하루하루가 늘 즐겁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어울린 오케스트라 합주.


언젠가 그날은, 새로운 마법이 펼쳐지는 그런 날이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