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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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17

2025-10
#트렌드춘천 #봄내를만나다
NRT, 외국인 계절근로자 건강 검진
춘천의 의사들, 외국인 근로자 건강 지킨 하루






여름 들녘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다.

이들은 농촌의 부족한 인력을 메우는 든든한 동력이지만, 정작 의료·복지에서는 소외되곤 했다.

그런데 지난 8월 30일, 신북읍 농업기술센터에선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외국인 계절 근로자들을 위한 무료 건강 검진이 열린 것이다. 지역 의사들의 자발적 연대, 시 행정의 체계적 지원, 시민사회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모여 ‘외국인도 춘천의 시민’이라는 원칙을 현실로 만든 감동의 순간이었다.


작은 병원이 된 농촌 진료소 

‘내과·정형외과·안과·피부과·정신건강의학과·치과.’ 진료과목 이름이 줄줄이 적힌 안내판이 농업기술센터 로비에 세워지자 건물은 작은 종합병원으로 변신했다. 8월 30일 토요일 오후 3시, 신북읍 농업기술센터. 일손을 멈춘 203명의 외국인 계절근로자들이 농장주의 차를 타고 속속 도착했다. 캄보디아와 필리핀에서 온 이들은 춘천 농촌을 지탱해온 ‘보이지 않는 손’들이지만, 이날만큼은 자기 몸을 돌보기 위해 모였다. 목에 건 이름표에는 ‘희망 진료과’와 ‘필요 약품란’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진료순서를 기다리는 외국인 계절 근로자들



행사장 곳곳에서는 통역사와 자원봉사자, 의료진과 공무원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근로자들은 차분히 호명을 기다렸다. 체온 측정, 문진, 시력검사, X-ray 촬영까지 일사불란하게 이어진 ‘외국인 계절근로자 건강검진’ 현장은 작은 종합병원을 방불케 했다. 코로나19 방역 당시 축적된 행정 경험이 접목되면서, 수 백 명의 근로자가 차례로 진료를 받았지만 큰 혼란은 없었다.



의사들의 연대, NRT

이날 환자들을 맞은 이들은 춘천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개원의사 다섯 명. 안과 서신초 NRT 대표, 정형외과 김봉규 원장, 내과 배병석 원장, 피부과 안재준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신기택 원장이다.

바쁜 일정을 접고, 그들은 기꺼이 흰 가운을 입었다. 다섯 의사의 모임 NRT는 2022년 11월 ‘받은 사랑을 돌려주자’는 뜻으로 결성됐다. 서신초 NRT 대표는 “우리가 해왔던 진료 활동과 의원이 시민 덕분에 존재하니, 이제는 돌려줄 차례였죠”라고 말했다. 장학사업과 작은 봉사로 시작된 모임은 지난해부터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의료봉사에 나섰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이번 검진은 하루였지만 준비는 몇 달 전부터 이어졌다. 지난해 일부 과에 몰렸던 혼선을 줄이기 위해 사전 조사를 철저히 했고, 결핵협회의 X-ray버스와 치과·안과 등 이동검진 버스가 현장의 빈틈을 메웠다. 호흡기 질환이나 골절이 의심되는 근로자는 X-ray촬영을 먼저 한 뒤 진료를 받았다. 한국보건의료재단에서 파견된 김순애 간호사는 “외국인 진료는 현장에서 꼬이기 마련인데, 여긴 정말 체계적으로 척척 돌아가서 놀랐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당시 호반체육관에서 수천 명을 검사·치료했던 춘천시의 행정력이 농업기술센터에서도 빛을 발했다.




 

통역사가 만든 다리, 환자의 안도

진료실 안, 크메르어(캄보디아의 공용어)와 필리핀어가 오갔다.

의사의 짧은 질문을 통역사가 환자에게 옮기고 다시 돌아오는 순간, 의사와 환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다리가 놓였다.

정형외과 진료실에는 다리를 절뚝이며 들어온 캄보디아 청년이 있었다. 의사는 무릎과 발목을 눌러보며 움직임을 살폈고, 청년은 통역사의 안내에 따라 조심스레 다리를 굽혔다. “일할 때마다 쑤신다”는 말이 의사에게 전달되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과에서는 캄보디아 여성이 소화불량과 속쓰림을 호소했고, 피부과에서는 등이 가렵다는 농부가 진료를 받았다. 짧지만 필요한 처방과 설명이 오가는 순간, 환자들의 표정에는 긴장 대신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진료를 마친 이들이 ‘약 받는 곳’으로 향했다. 자원봉사자들은 표시를 확인한 뒤 기부받은 일반 의약품과 정성껏 마련한 선물을 쇼핑백에 담아 건넸다. 필리핀 출신 후안 바쿨루 씨는 통역을 통해 “알러지 약도 넉넉히 주셔서 기분이 좋다. 의사 선생님이 피부과 알러지 약은 가려울 때만 먹으라고 하셨다.”며 웃었다. 토마토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는 올해 한국 방문이 세 번째였다.

진료실 밖에서는 학생 봉사자들은 환자 안내, 의료용품 운반, 진료 보조를 맡았다. 안과 이동버스에서 봉사하던 서윤(15) 양은 “외국인 분들이 ‘고맙다’고 할 때마다 힘이 난다”고 환하게 웃었다.




농촌을 바꾸는 제도

춘천 농촌은 외국인 계절근로자 제도 덕분에 변화를 겪고 있다.

2018년 107명으로 시작한 근로자는 올해 426명까지 늘었다. 특히 올해는 ‘공공형 계절근로자 사업’을 도입해 농협이 직접 근로자와 계약을 맺고 농가에 안정적으로 파견하는 구조를 마련했다. 농민은 장기 고용의 안정을, 근로자는 안정된 일자리를 얻는다.


신북읍에서 딸기 농장을 운영하는 심명섭 농부는 “예전에는 매번 새로운 인력을 구해 일을 가르쳐야 했다. 하지만 계절근로자들과는 8개월 동안 함께하다 보니 손발이 척척 맞는다”며 만족을 드러냈다. 농촌의 인력난을 덜고 근로자 권리를 보장하는 상생 구조가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홍미순 춘천시 농업정책과장은 “외국인 노동자의 건강권도 우리 국민과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건강검진은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농촌 사회 지속 가능성을 지탱하는 안전망임을 보여주는 하루였다.


협업이 만든 시스템

농업기술센터에는 이날 NRT 의사, 춘천시 관내 서울아산내과, 본수치과 의료진, 춘천시 공무원, 가족센터 통역사, 시민·학생 자원봉사자가 모였다. 이날 봉사활동을 총괄했던 (주)인비전 김태경 대표는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일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맞물린 덕분에 ‘작동하는 병원’이 가능했다”며 “NRT가 가는 곳에 언제나 함께할 것”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여러 기관의 지원도 뒷받침됐다.한국의사100년기념재단과 보령제약은 의약품을,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과 대한결핵협회는 이동검진버스를 제공했다. 춘천시는 코로나19 방역 경험을 바탕으로 동선을 설계하고 언어 문제를 보완했다. 단순한 봉사를 넘어,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한 협력 현장이었다.


검진을 마치고 돌아가는 근로자들의 손에는 커다란 선물 봉투가 들려 있었고, 얼굴에는 안도감이 남았다. 의사와 통역사, 봉사자, 그리고 보이지 않게 뒷받침한 수많은 기관과 행정이 만들어낸 하루는 춘천을 더욱 따뜻한 도시로 만들었다. 춘천시는 앞으로도 계절근로자 제도를 확대하고, 외국인 근로자의 권익 보장을 위한 정책을 이어갈 계획이다. 작은 봉사로 시작된 연대는 이제 농촌의 미래와 도시의 품격을 함께 높이는 힘이 되고 있다.

확인된 것은 단 하나였다. 도시는, 그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를 품을 때 더욱 건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