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춘천시정신건강복지센터 박지형 선임이 효자동의 한 가정을 찾았다.
홀로 사는 60대 남성은 가족을 잃고 집 안에만 머물던 터였다.
뜻밖의 방문에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괜찮으세요?”라는 짧은 안부가 무너져가던 마음에 다시 숨을 불어넣었다.
춘천시가 최근 자살률 증가라는 무거운 현실 앞에서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응답하고 있다.
종교계, 지역 주민, 자살위험군 대상 맞춤형 프로그램까지, 춘천시가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이어가는 ‘생명존중’의 물결이 시민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위기의도시,생명지키기에나서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왜 이리 높나요?”
지난 6월 5일 21대 대선 후 열린 첫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한 말이다. 정부가 높은 자살률을 국가적 과제로 지목한 가운데, 춘천시는 이미 지역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자살예방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네가 있어, 나도 있다’는 슬로건 아래 2023년부터 선제적으로 자살예방 프로그램과 생명존중 캠페인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춘천시가 자살예방과 생명존중 캠페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는 다름아닌 춘천의 자살률이다. 춘천은 아름다운 K-호수도시라는 명성 이면에, 전국 평균을 웃도는 자살률과 시민 우울감 경험률 증가라는 고통스러운 과제를 안고 있다. 춘천의 2021~2023년 우울감 경험률은 강원도 내 1위(평균 9.7%), 2023년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30.8명으로 전국 평균(27.3명)보다 높다. 실제로 2020년 이후 자살률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며 시민들의 정신건강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정신과적 문제(37.2%)와 경제적 어려움(21.3%)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2024 정신건강의 날 및 자살예방의 날 기념행사 중 생명존중 비전선포식
춘천시는 이를 공공의 긴급 현안으로 인식하고, 경찰서·소방서·교육지원청·국립춘천병원 및 지역 의료기관 등과 춘천시 생명안전망 구축을 위한 간담회(24.8.19)를 시작으로 협력 네트워크를꾸렸다. 2024년 10월 17일 ‘자살예방의 날’에는 자살예방 선포식을 열고 시민 생명안전망 강화에 돌입했다. △근거중심 춘천형 자살예방 △범사회적 생명안전망 구축 △자살위험요인 집중관리 △고위험군 위기개입 지원 △생명존중 안심마을 확대 △자살예방 인프라 강화 등 6대 전략도 본격 추진 중이다.
“번호만누르면”…당신을위한따뜻한손길
춘천시정신건강복지센터는 24시간 운영되는 정신건강 위기상담(1577-0199)과 자살예방 통합상담(109) 핫라인을 통해 즉각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전화는 단순 상담에 그치지 않고, 개인정보 활용 동의 후 상담사·사례관리자가 정기 방문, 정신의료기관 연계, 자살 유족 지원 등 사후 관리까지 책임진다. 특히 대표 프로그램인‘살아내는 삶은 프레전트(SARP)’와 자조 모임은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춘천시 정신건강복지센터 자살예방팀 박지형 선임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힘든 시간이 있지만, 그 시간을 함께 건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며 “전화 한 통이 생명을 지킬 수 있다. 주저하지 말고 연락해 달라”고 말했다.
춘천은 자살률 증가에 따른 지역사회 위기감, 그리고 이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공감대 위에서 다양한 예방 사업을 전개중이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이 ‘생명존중 안심마을’ 사업이다. 지역의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여 읍·면·동 단위로 촘촘한 자살예방 사업을 펼쳐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난해부터 맞춤형 자살예방사업을 시작한 춘천시 동면은 자살 고위험군을 발굴해 정신건강의학과 상담 및 치료비를 지원하는 등 범사회적 자살 예방 환경을 조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지역 내 인식개선 캠페인, 자살예방 교육, 자살수단차단 등을 펼쳐 사업 효과를 끌어올렸다.
무엇보다 이 사업의 핵심은 생명지킴이(게이트키퍼 Gatekeeper) 양성이다. 게이트키퍼란 자살 위험 신호를 알아차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하는 시민을 말한다. 춘천시민이라면 누구나 생명지킴이가 될 수 있다. 시 정신건강복지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하면 된다. 실제로 자살예방을 위한 효과적인 전략 중 하나가 생명지킴이를 양성하는 것이라는 연구 결과(WHO, 2014)도 있다. 생명지킴이가 많아질수록 그 지역의 자살률은 낮아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춘천시는 이런 촘촘한 생명안전망을 만들기 위해 생명존중안심마을 늘리기에 힘쓰고 있다. 지난해 동면 1곳에서 시작했던 사업이 2025년에는 교동과 신북읍까지 확대되어 총 3곳이 됐다. 각 마을에서는 이·통장이 중심이 되어 마을의 자살 고위험군을 직접 챙기고, 위기 시 즉시 상담·기관 연계에 나선다. 시골 길과 골목을 발로 뛰며 주민의 안부를 살피는 이들의 역할이 마을 안전망의 핵심이다.
정신건강 인식개선 및 생명존중 문화조성 캠페인
게이트키퍼를 중심으로 한 이런 노력들이 쌓여, 춘천은 점점 더 ‘생명의 울타리’로 단단해 지고 있다.
춘천정신건강복지센터 김윤정 팀장은 “누구나 생명지킴이가 될 수 있고, 한 사람의 관심이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며 “안심마을이 늘어날수록 춘천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이주인공이되는,생명존중춘천
시민들은 ‘네가 있어, 나도 있다’는 슬로건 아래 직접 생명지키기에 나선다. 최근 시는 택시 운전자를 대상으로 하는 자살예방교육을 진행했다. 매일 많은 시민을 만나는 택시 운전자들은 자살 위험군 승객을 조기 발견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춘천 곳곳에 그물망처럼 우리 이웃들이 서로를 지켜주고 있었다. 동면 장학리에서 북산마트를 운영하는 남기주(68)·김옥조(69) 씨 부부는 “번개탄은 눈에 띄지 않게 창고에 두고, 필요한 이들에게만 판매한다”며 “50년 넘게 가게를 지켜왔는데, 힘든 사람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어 사고를 막기 위해 늘 신경 쓰고 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로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생명존중 문화조성 위한 춘천 6대 종교계 실무자 간담회
춘천시는 천주교·기독교·불교·유교·천도교·원불교 등 지역 내 6대 종교단체와 함께 종교협의체를 구성해 생명존중 문화확산에도 힘쓰고 있고 지난 4월부터는 의사회, 약사회, 간호사회 등 의료계도 자살예방사업에 동참했다. 특히 춘천시정신건강복지센터는 시민과 지역 기관들을 대상으로 ‘마음안심버스’를 운영해 현장에서 스트레스 측정, 정신건강선별검사, 상담 등 다양한 시민참여형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찾아가는 마음 안심버스로 지역주민 심리상담 제공
마음건강과 윤영주 과장은 “쑥스러워 미뤄왔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이웃의 안부를 건네는 새로운 시도들이 시민들 사이에서 잔잔하게 번지는 것을 느낀다”며 “시민들이 서로 협력해준 만큼 저희들도 생명 안전망 구축에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자살’이라는 무거운 단어 대신, “네가 있어서 산다”는 작은 온정이 춘천을 바꿔가고 있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시간이 찾아온다면, 혹은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춘천시는 그 손을 꼭 잡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