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상자에 자리해 있는 활자들
- 사람
그는 선인이다. 첫인상이 그렇다. 미소 짓는 얼굴과 나직한 목소리가 친근하고 따스하다. 마치 해맑은 겨울 햇살 같다. 비록 목소리가 크지는 않지만, 듣는 이에겐 깊은 골짜기 물소리 같아서, 누구든 다소곳이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그게 그가 지닌 매력인 듯싶다.
마치 어린 날, 교회당 풍금 소리처럼 아득하고 그리운, 나의 외할아버지 같은 그런 정겨움이 그에게선 느껴진다.
그는 겸손이 늘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다. 누구든지 그를 한 번만 만나기만 하면 알게 되리라. 오래오래 사귀어왔던 듯한, 추억 같은 그런 사람.그래서 늘 곁에 함께 하고 싶은, 친근과 다정함이 저절로 마음 안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사람 …전·용·태
그러나 한없이 부드럽고 섬세한 그에게 강인한 내면의 힘이 숨겨져 있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 보통 예삿일이 아니었기에.
그는 현재 직함이 박물관장이다. 이 독특한 책과인쇄박물관은 전국에서 유일한 사설 인쇄박물관이다. 그 보물단지가 10년 전부터 춘천 실레마을에 우뚝 서 있다. 이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마법의 황금성이나 다름없다.
- 섬과 섬 사이 별을 찾아서
전용태는 젊은 시절 신문사에 입사하여 총무 일을 맡았다. 매일 신문사 공무소를 들락거렸다. 문선대에 꽂힌 어마어마한 활자를 보고 마치 은하수가 깔린 듯싶었다고 한다. 활자 하나하나가 별처럼 반짝였다. 문선공이 뽑은 보석 같은 납활자를 식자공이 조판하는 일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문장이 나란히 배열되고 하나의 글이 완성되는 과정이 신기하게만 여겨졌다. 그러다가 활자의 냄새가 느껴지고 어떤 생각의 향기가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10년의 신문사 일을 그만두고 인쇄소를 차렸다. 직접 책을 만드는 출판사도 겸했다. 인쇄소도 출판사도 모두 잘 되었다.그렇게 30여 년 책을 만들었다. 보람이 있었다. 그동안 오래된 문학서나 고서, 인쇄에 관련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휴일이면 고서점과 문 닫은 인쇄소를 수소문하여 찾아다녔다. 한 점 한 점 모으는 일이 재미있었다. 사업의 수익을 대부분 사라져가는 귀중한 책과 인쇄자료를 수집하는 일에 투자했다.
신기하게도 섬에는 인쇄자료가 풍부했다. 80년 옵셋 인쇄와 전산시스템의 등장으로 활판 인쇄가 쇠락하자 대부분 인쇄소는 활판을 고물로 처리했다. 그래서 남은 활판이나 인쇄자료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인쇄소는 비록 문을 닫았지만, 섬 지역엔 의외로 활판 인쇄 기계가 제법 남아 있다는 풍문이 들렸다. 이곳저곳 섬을 돌아다니던 그 시절은 참으로 보람 있고 행복한 날들이었다.
전용태 책과인쇄박물관 관장이 직접 인쇄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30여 년 세월 동안 책과 활판 인쇄물을 조금씩 모아갔다. 모으다 보니 어마어마한 자료가 창고에 쌓였다. (지금 전시되고 있는 인쇄물은 비밀의 장소에 보관된 전체 분량의 1/10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이렇게 모은 책과 인쇄물들을 널리 알리기로 전용태은 마음먹었다.
사설 인쇄박물관을 세우는 일은 전용태가 이때까지 품어왔던 오랜 꿈이었었다.
그렇다.
책과인쇄박물관!
- 방랑, 어디에서 너를 세우랴
처음엔 제주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올레길을 일 년 동안 걸었다. 하지만 인쇄박물관을 하기엔 적당한 장소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듬해 서울에서 가까운 문학관을 물색했다. 양평의 황순원 문학관, 봉평의 이효석 문학관을 둘러보았으나 여러 가지 여건이 맞지 않았다.
15년 전 전용태가 실레마을을 찾았을 때는 6월의 오후였다. 금병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김유정 문학촌은 평화롭고 아늑했다. 그때 인근 원두막을 발견했다. 전용태는 오이밭 원두막에서 잠시 땀을 들였다. 그 원두막 자리가 바로 ‘책과인쇄박물관’이 들어설 자리란 걸 그때는 까마득히 몰랐다.
마침내 건물을 지을 부지가 마련되었다.
2년 동안 공사 기간을 거쳐 4층 건물이 완공되었다. 2015년 개관의 문을 열었다.
그날은 우리나라 최초의 <책과인쇄박물관>이 등장하는 날이었다.
오후, 삼악산 꼭두서니 노을빛이 장관을 이루었다. 전용태의 눈에도 그렁그렁 눈시울이 붉어졌다.
- 파문처럼 번지는 소문
호수에 잔잔한 파문이 일 듯 소문은 소리 없이 번졌다. 김유정문학촌을 찾아온 이들이 책과인쇄박물관으로 찾아들었다. 블로그를 보거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졌다. 외지에서 하나둘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모여들었다. 활자가 한 장 한 장 종이에 박히는 장면을 신기한 듯이 눈여겨보았다. 문선대에 진열된 활판에서 먼 고려시대의 금속활자를 떠올리는 이도 있었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종이에 선명히 찍힌 글자를 쓰다듬었다. 손끝을 스치는 질감에서 저릿한 감동을 맛보는 어른들도 있었다. 세월 저쪽의 시간이 하나하나 스크린처럼 다가오는 느낌이라고도 했다. 찾아온 손님들은 체험학습을 통해 자신의 시나 글이 인쇄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생각의 시간이 이토록 소중한 줄 이제야 알겠노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을 가슴에다 소중히 품곤 했다.
책과인쇄박물관은 활판을 통해 자신을 깨닫는 소중한 체험의 공간이 되었다.
인쇄된 한 줄의 문장이 이토록 행복하고 아름답다니!
- 찾아온 특별한 손님들
어느 날 유시민과 김영하 작가가 왔다.
전국 박물관을 두루 여행하며 대담하는 TV프로였다. 그들이 방영한 프로로 하여 하루에 천여 명의 관객이 몰려들 때도 있었다. 대단한 인기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코로나19로 하여 책과인쇄박물관은 2년여 동안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시민 작가가 한 말은 똑똑히 기억했다.
전국 박물관 투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박물관은 단연 책과인쇄박물관이었다고.
- 소월의 진달래꽃 100년, 책과인쇄박물관 10년
그러나 이제 다시 시작한다.
책과인쇄박물관 10년이 된 올해, 드디어 빛나는 일을 해냈다. 올해가 소월 시집 ‘진달래꽃’이 나온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책과 인쇄박물관은 이를 기념하여 활판 인쇄 방식으로 한정판 시집 1,000부를 출간했다. 그리고 10월 말까지 ‘시의 시간’ 특별전을 열고 있다.
이 시집은 판화 방식처럼 1,000부 중 몇 번째 시집인지가 명시되어 있다. 나는 이 보석 같은 시집을 내 가까운 친지에게 선물로 보내고 싶다. 나나 우리 모두에게 영혼의 불씨 같은 이 시집을!
나는 오늘도 이 시로 하여, 내 마음에 흐르는 날과 날들을, 늘 메아리처럼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