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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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14

2025-07
#최돈선의둘레마을이야기 #봄내를품다
최돈선의 둘레마을 이야기 31
마적산
최돈선 시인. 춘천시 둘레엔 1개 읍, 9개 면이 있다.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 고요한 곳에 현자는 있을 것이다. 당산목 같은 우직한 당신의 사람들이.

마적산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즉시 마적馬賊을연상했었다. 벌써 사십 년 전 얘기지만 지금도 그 생각을지울 수 없다. 하지만 정확한 표기는 말 마 馬, 자취 적 蹟이다.산의 모습이 말발굽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마적이란 지명에 대해선 아직도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이많다.




나는 아직도 맥국(샘밭)의 들판을 달리는 마적을 상상한다.그리고 나는 그 마적산 이름을 들은 뒤, 사십 년 뒤에야비로소 첫 마적산 산행을 시작한다.


오르다 길가에 누운 죽은 나무를 적당히 분질러 땅을짚었다. 나는 산을 오를 때면 언제나 이 방법을 쓴다. 죽어서‘쓸모없음’이 나의 지팡이가 되어줌으로써 그 나무는 ‘쓸모있음’이 되는 것이다. 죽은 나무는 제법 큰 진달래 가지였다.그래, 고맙다. 잠시 좀 길을 안내해 다오.

오름은 늘 이렇게 시작된다. 내게 있어, 오름은 정상에닿음이 아니다. 단순하게 하나의 과정일 따름이다. 이 산에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고요히 숨결을 나누는 한 걸음 한걸음일 뿐이다.


잠시 숲 사이로 난 길을 바라본다.


산을 느낀다. 나무를 느끼고, 어제 내린 비를 느낀다. 바람이스쳐감을 느끼고, 그 스쳐감에 생강나무 이파리에 맺힌이슬방울이 도르르 도레미로 구른다. 그 영롱함이 산의살결인 흙더미에 가뭇없이 스며든다.


인생은 서로를 스치는 것이다.


우리 일행 일곱은 나무를, 나무의 잎을, 돌과 바람을 스친다.초록 색깔과 산길을 가는 이들의 호흡을 스치고, 바위와하늘과 구름을 스친다.


일행은 자연히 빠르게 스쳐가는 이와 느리게 스쳐가는 이로갈린다. 하지만 빠름과 느림은 모두 한길이다. 잘못 길을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느리게 스쳐 가는 이들 셋은 소나무 연리지連理枝를 지난다.



연리지란 두 나뭇가지가 서로 맞닿아 결이 어울린 것을말한다. 그걸 사람들은 부부 화목이나 남녀 사이 사랑의관계로 해석한다.


백낙천이 지은 시 ‘장한가’엔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늘에서 만난다면 비익조가 되기를 원합니다. 땅에서만난다면 연리지가 되기를 바라지요.


당 현종과 양귀비와의 사랑을 표현한 것인데, 이들의사랑(?)은 결국 나라가 망하는 길로 가고 말았다. 비익연리 比翼連理란 사자성어는 오늘의 우리 현실에도연관되어 뼈아픈 교훈을 주고 있다. 바로 얼마 전, 우리에게닥쳤던 엄청난 일을 우린 똑똑히 기억하니까.


‘빠르게 스쳐 가는 이들’이 기다리는 숲에 닿았다. 이들은우리 ‘느리게 스쳐 가는 이들’을 오래 참고 기다려주었다.그래, 그렇게 다들 만나는 것이다.


우린, 배후령길, 소양댐길, 윗샘밭길이 표시된 이정표 공터숲에서 가지고 온 김밥으로 요기를 때운다.


요기를 끝내고, 도랑처럼 움푹 파인 길을 우해 오르니 울창한소나무 숲이다. 길은 숲을 뚫고 들어온 햇살 무늬로 하여신비한 느낌을 자아낸다.


마치 잠수하여 어릿어릿 수면을 쳐다보는 느낌이다. 그만큼숲은 물속처럼 고요하고 깊다.



마적산 중간 전망대에서 바라본 샘밭은 탁 트인 평야지대이다. 저곳이 바로 고도古都 맥국貊國 터다. 그런데 이내가껴 푸른 기운이 자욱하다. 어제 내린 비가 이내를 만든 것 같다.‘이내’란 말은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을뜻한다. 원래는 저녁 무렵에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마 용바위가 뿜어대는 입김이 아닐까 하고 상상해 본다.용바위는 8부 능선쯤에 위치해 있는데, 누군가 동그란여의주 하나를 용 앞에 가져다 놓았다. 아니다. 용이 토해놓은 진짜 여의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겨도 될 만큼,그 돌은 은은히 빛나는 둥근 우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8부 능선은 퇴적암층이 물결을 이루는 습곡지대이다.습곡褶曲이란 말은 우리말로 풀이하면 땅주름이라고 한다.대개는 바닷가에서 발견되는데 해발 600m의 산중에서발견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오래전 지각 변동에 따라 땅이융기한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본다. 저 드높은 히말라야도바닷속 단층이 서로 충돌하여 솟아오른 산맥이 아니던가.히말라야엔 그래서 선사시대 바닷속 생물들의 화석이 숱한비밀을 간직한 채 숨어 있다. 히말라야엔 또한 눈부신 붉은소금산이 있어 현재 우리의 식탁엔 히말라야의 붉은 소금이놓여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용머리만 있고 몸과 꼬리는 어디 갔지? 라고누군가가 묻는다면, 이 마적산은 신기하게도 몸과 꼬리가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게 마련이다.

조금만 더 올라가 보라고…, 그렇게 넌지시 하늘의 구름을가리키며 속삭이는 것이다.


오 그렇구나. 꿈틀거리는 용이로구나. 이제 마악 하늘로솟아오르려 하는구나. 이 절묘한 용머리와 용꼬리의 조합은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마적산 산신이 있다면 이게정말 당신의 작품인가 묻고 싶다.


이래서 산객들이 마적산을 찾는 것일까.


나는 오르다가 길섶에 홀로 핀 산붓꽃 한 송이를 발견한다.그런데 그 산붓꽃이 조용히 흔들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게아닌가.



그거야 누구든 다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


나는 오래오래 산붓꽃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외로운 그 꽃이어디에서 왔을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 꽃에게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나는 말을 잊었고, 산붓꽃은 흔들림을 멈췄기에.산들바람이 꿈결처럼 스쳐 갔다.

시간은 정지된 채 그대로였다. 그냥 고요하고 온우 보랏빛뿐이었다.


마침내 우리는 맥국을 한눈에 거느리는 정상에 도달한다.소양댐이 내려다보이고 동쪽 건넛산들이 물결치듯 푸르게젖어 있다. 북쪽 오봉산이 손에 잡힐 듯 친근하다. 작년에 저다섯 봉우리를 넘고 넘었었지.


둥글게 돌담을 싼 기원단엔 <맥국해맞이기원단>이란석비와 마적산 605.2m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나란히안치되어 있다.


맥국 사람들은 해마다 정월이면 이 산 정상에 올라 해맞이와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내가 많이 잦아져 시야가 제법 선명해졌다.


내 눈에 선명히 잡힌 꽃이 백선꽃과 쥐오줌풀꽃이다.쥐오줌풀꽃은 꽃밭을 이루었는데 유난히 백선꽃은 딱 한대뿐이다. 그래서일까. 그 기품이 자못 고고하다.


올랐으면 오래 머물지 말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권력의 정상에 서면 그 정상에서 오래 머물고자권력을 휘두른다. 만족하고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즉시내려와야 한다. 산행에서 그것은 철칙이요 깨우침이다.자신의 길인 본심으로 되돌아감은 만고의 진리이거늘.



내려올 때, 오던 길을 잊어버려, 산봉우리 하나를 더 넘었다.그래도 마냥 기분이 좋았다.

마침내 지팡이를, 산을 내려온 뒤 땅에 꽂았다.


지팡이를 꽂아놓았더니,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마의태자전설을 나는 기억해 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지팡이에게 이렇게 빌고 말았다.

-그 아무것도 되지 않기를.


응?

이거 덕담인가. 아니면 농담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