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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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38

2019.3
#봄내를 품다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
의암 류인석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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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사회 변화가 이뤄진 격랑의 시기에 조용한 ‘봄의 고장’ 춘천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은 1970년부터 40여 년간 토박이 언론인으로 이 고장에서 일어난 사건과 변화를 지켜본 필자가 그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숨은 일화와 뒷이야기들을 전하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구국항일투쟁의 산실 의암 유적지를 찾다





“아! 우리 이천만 동포는 스스로 통탄해야 할 것입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대대로 피맺힌 원수 왜적을 이겨 없애야 합니다. 우리의 임금을 지극히 높은 지위로 되돌려 모시고 우리의 백성을 쾌활한 땅으로 올려놓아야 합니다. 인석은 다만 죽음을 무릅쓰고 영원히 의병의 깃발을 굳게 잡을 뿐입니다.”


의암(毅庵) 류인석(柳麟錫·1842~1915) 선생의 나라사랑을 기리기 위해 춘천시 남면 가정리 유적지 정문에 세워진 대형 어록비에 새겨진 글이다.





남면 가정리 의암류인석유적지(1985)



필자가 강원일보 기자 시절 작성한 의암 유적지 탐방 기사 (1976)



멀리 러시아 연해주(沿海州)에서 의병항쟁을 이어가며 본토 수복을 꿈꾸던 의암 류인석 선생. 1910년 급기야 국권마저 빼앗기자 성명회(聲明會)를 결성, 국내외에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과 결의를 선포한 선언서(의암집 37권 중에서)의 한 구절이다.


올해는 한일병합조약(1910)이 체결된 후 민족자결정신을 선포하고 일본제국의 침략을 세계 만방에 고발했던 3·1운동을 일으킨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4월 11일)되고 독립운동의 불씨를 당긴 고종 황제가 사망(1월 21일)한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누란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려던 선생의 강인한 결의와 기개를 뿜어낸 성명(聲明)이 여느 해보다 더욱 새롭고 각별하게 호국정신을 일깨운다.






의병마을


학자에서 조국광복 위한 항쟁의 길 선택


의암 류인석 선생은 1842년 1월 27일 깊은 산골이었던 춘천부(시) 남면 가정리 우계 고흥 류 씨 류중곤 집안에서 태어났다. 바로 의병의 탄약을 만들고 훈련시켰던 여우냇골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글쓰기를 좋아해 이미 8세 때 소학을 줄줄 읽어냈다. 14세 때 친척 류중선의 양자로 입양된 후 당대 최고의 대학자인 화서 이항로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입신양명을 버리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했다. 그른 것을 배척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과 학자로서의 자질을 다졌다. 청년 시절에는 전국 각지의 명산대찰을 누비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문무를 두루 갖춘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길렀다.


당시는 일본이 내정간섭을 위해 경복궁을 점령(1894년)한 후 김홍집을 비롯한 친일파로 내각을 구성,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왕조의 제도를 마구 뜯어 고치고 을미사변인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공포(1895년)가 연이어 일어나 나라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 격이었던 시기였다.

전국적으로는 의병이 분연히 일어나 구국항일투쟁이 벌어졌었다.


이에 성재 류중교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아 화서학 파의 종장(후계자)에 오른 선생은 제자와 유생들과 함께 쓰러져 가는 나라의 변란에 어떻게 대처할지 뜻을 모았다. 그리고 나서 춘천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구국투쟁에 나섰다. 학자에서 호좌창의대장(의병대장)을 맡은 후에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의병 3,000여명을 모았다.


충주 관아를 점령하고 이어 영월 제천 청풍 단양 등지를 장악, 개화정권을 지지하는 친일지방관서장들을 참형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친일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에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가 온 몸을 던져 불굴의 투지로 구국투쟁에 나섰다. 그 후 1910년 13도의군도총재에 추대돼 본토 수복을 도모하다 국권마저 빼앗기게 되자 대한의 민의(民意)를 모아 성명회를 결성, 국내외에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천명하고 지지를 호소했다.


이때 대학자로서의 학문과 세계관을 문답형식으로 저술한 우주문답(宇宙問答) 등을 펴낸 후 온갖 고초 속에서 1915년 1월 29일 중국 요녕성 방취구(芳翠溝)에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74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의암기념관 내부


역사적인 지역대표 인물로 선양사업 본격화


망명지인 중국 요녕성에 안장되었던 유해를 현 유적지로 이장(1935년)한 후 정부는 1962년 류인 석 장군이 조국 광복에 세운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6년 전국 각지의 지역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을 기리는 정책에 따라 처음으로 선양 사업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사진 참조) 그 첫 사업으로 의암동상(공지천변에서 삼천동 시립도서관 정원을 거쳐 현재는 의암공원에 위치) 제막식을 가졌다.

이듬해에는 예산 3,500만원의 종잣돈으로 의암 묘역도 새롭고 말끔하게 단장했다.


조선 사당(祠堂) 양식의 영정각과 홍살문, 비석 등을 세우고 다리와 진입로를 뚫었다. 앞에 있는 샘물로 충효지(忠孝池)를 만들어 호국정신을 재현했다. 그렇지만 의암의 정신사적 사상과 활동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다. 고장은 물론 자라나는 세대들이 선생의 업적을 자세히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꺼져 가는 선양사업의 불씨가 고장의 학자들과 유족들의 참여로 묘역에서 제1회 의암제(1985년)를 거행하면서 되살아났다.


본격적인 유적지 조성사업을 착공(1996년)해 7년 간 기본공사를 마친 후에는 부지 8만 5,900㎡에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인 66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기념관, 의열사, 관일정, 충의문 등을 새로 지었다.

이어 전국 최초로 의병마을과 망루를 재현하고 수련관을 건축, 학생들과 참배객들이 현장 체험과 학습을 통해 구국 정신을 기릴 수 있도록 꾸몄다. 또 묘역을 강원도기념물(제74호)로 지정(2000년), 성역화사업을 끝냈다.


그리고 1896년 처음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세상을 떠나기 이전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20년간 벌인 발자취를 더듬어 관련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고 학문과 사상 및 체계적인 항쟁사를 연구하는 활동에 나섰다.

특히 중국 평정산진 경내에 기념사업회와 중국정부가 함께 세운 의암선생기념원(2002년 제막)은 지금까지 해마다 선생의 유적답사반이 찾아가 참배하고 있다.




의암 류인석선생 초상화


남면 가정리는 항일투쟁의 산실


의암 류인석 유적지를 찾은 날은 입춘이 훨씬 지났는데도 바람이 몹시 불고 을씨년스러웠다. 의병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의병운동의 산

실이라기보다는 양지바르고 고즈넉한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었다.


춘천시청에서 30분 정도 차로 달리다 국토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홍천강에 놓인 충의대교를 왼쪽에 두고 5분쯤 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마을이었다.

동쪽으로는 삼강산, 서쪽으로는 두니산, 북쪽으로는 수락산이 둘러싸고 있다. 산자수려(山紫水麗) 한 심산유곡(深山幽谷)으로 고흥 류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 곳이다.


아직도 유교의식이 도드라진 가정리(柯亭里) 마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尹 熙順·1860~1935) 의사의 묘소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충의대교를 건너 홍천 쪽 10분 거리인 서면 모곡리에는 무궁화꽃에 애국심을 담아 나라사랑을 실천한 독립운동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유적지가 지척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가정리는 봄내골 의 자랑이자 구국항일투쟁의 산실이요, 요람과 같은 지역으로도 꼽힌다.


바로 우리 고장을 일컬어 ‘애국(愛國) 충절(忠節)의 고장’으로 부르는 동인(動因)이다.

초가집 여러 채가 옹기종기 자리 잡은 전국 최초의 의병마을은 가솔과 동지들을 이끌고 타지와 이국땅에서 유랑과 망명을 마다하지 않고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조국 광복에 큰 공을 세운 행적이 되살아나는 듯 싶었다.


또 유적지에 전시된 유품을 관람한 후에는 지난 1976년 강원도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로 선정되기 이전부터 끊임없이 선생의 사상과 학문, 행적에 대해 자료 수집과 연구에 매진해 온 최승순(전 강원대 명예교수), 이춘근(전 강원대 총장), 원영환(전 의암학회장), 최상익(전 강원대 교수), 이구용(전 강원대 교수), 엄찬호(전 의암학회장), 허준구(춘천문화원 사무국장) 등과 향토사학자 및 관련 학회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의암 류인석 선생 추모제(1985)



옷깃 여미게 만든 김구 선생 고유문비


유적지에는 의병마을과 수련관 등이 있어 얼마 전 까지도 해마다 2만여 명의 교육생과 방문객이 찾았다. 도내에서 학생들을 선발, 일주일씩 구국항쟁에 나섰던 의병정신과 애국심을 계승시키기 위해서였다.

귀한 짬을 내 필자의 유적지 탐방을 안내한 박영택 전 류인석 유적지 본부장은 텅 빈 마을과 수련원을 가리키며 “학생들을 위한 나라사랑운동과 교육이 점점 쇠퇴되어 가고 있다”며 “전국 현충시설 가운데 예산이 가장 적어 어려움이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세계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국제문제와 외교관계가 삐걱거리고 그동안 정치권이 끊임없이 안보장사(?)만 벌여 온 탓이었을까?

백범 김구 선생이 광복 후 환국해 가장 먼저 의암묘소를 찾아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달라” 고 손수 써 내려간 친필 고유문비가 3·1절 100주년을 맞아 애국선열들을 향해 옷깃을 여미게 했다. 고향 사랑이 지극한 애국의 시름으로 절절히 묻어난 의암의 ‘소양정에 올라서’를 되뇌이며 발길을 돌렸다.



수춘(춘천)의 경치는 동외에 제일이라

더더욱 소양강변 소양정이 서 있구나

저 멀리 삼악에서 청광이 뻗어오고

길이길이 두 강에서 원기를 끌어오네

꽃 비친 화랑에 고인의 시판이 있어

바람 이는 물가에서 술잔을 드네

오랑캐 노랫소리 기어이 끊게 하면

우아한 소악곡에 봉황이 돌아오라


- 의암 류인석 소양정에 올라서








글 김길소(본지 편집위원·한국전래오락연구소장) 사진 강원일보

춘천 태생. 1970년 강원일보사에 입사해 편집국에서 강원도 전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취재했다.

편집국장, 논설주간, 상무, 전무이사를 지낸 후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위원과 부위원장으로 언론사와 피해자의 중재 역할을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