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선생님의 좋은 점은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의 관심사가 담긴 책을함께 읽고 책 대화를 할 수도 있고, 사회 현안을 두고 토론을 하기도 한다. 라디오 사연을 함께 듣거나 유행하는 노랫말을 같이 읽는 것만으로도 좋은 수업이 된다. 국어 시간에우리는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언어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배운다. 눈앞의 일상부터 아득하게 먼 꿈까지 수업의소재가 된다. 때문에 국어 교사의 경험은 특히 중요하다.
지난해 세계여행을 다녀온 나는 그 덕을 조금 보고 있다.여행하며 만난 사람들과 예기치 못하게 맞닥뜨린 고생담을 들려준다.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이 겪은세계를 상상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꿈을 그린다.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꼭 걸을 거예요.”
“핀란드에 가고 싶어요. 오로라도 보고, 수많은 호수도 보고, 산타 마을에도 갈 거예요!”
“쌤, 저는 삿포로에 가서 폭설을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비행기가 결항 되어서 공항에서 한번 자보고 싶어요.”
어휴, 얘가 진짜 고생을 해봐야 정신 차리지. 치기 어린 낭만으로 그린 꿈이어도 좋다. 아이들이 꾸는 꿈은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 마냥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더 예쁘다. 이런이야기를 할 때 아이들 눈은 더 반짝 빛나곤 한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만큼의 세상을 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버스로 5시간 거리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경계였다. 튀르키예에서 10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유럽에서 육로로 국경을 넘고, 대륙의 끝에서 해가 넘어가는 대서양을마주했을 때 비로소 내 세계가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아이들의 지평도 조금이나마 넓혀주고 싶은 마음이다. 지도를 펴놓고 내가 가본 곳을 짚어주기도 하고, 어느 도시가어디에 있는지 같이 찾아보기도 한다. 좋은 글을 발견하면인쇄해서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눈다. 함께 읽기는 서로의 세계를 확장해주는 아주 멋진 여행이다.
나는 내가 가진 작은 재주라도 수업에 활용하려고 하는 편이다. 대학 시절 배운 기타가 유용하게 쓰인다. 매년 아이들을 위해 노래 한 곡씩 만들어주는 프로젝트도 10년째 진행하고 있다. 나무가 등장하는 시를 배울 때는 기타를 치며김광석의 〈나무>를 불러주었다. 겨울나무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영하에서 영상으로 밀고 올라가 마침내 꽃을 피운다는 시였다. 시를 읽고, 노래를 들은 후 아이들에게 각자의 나무를 그리게 했다. 아이들의 나무는 다 다르고, 아름다웠다.
여름방학 보충 수업 때의 일이다. 바다에 대한 딱딱한 글을 읽어야 했다. 방학에도 학교에 나와 어려운 문제만 풀어야 하는 아이들에게 바다를 선물하고 싶었다. 우선 바다 영상을 준비했다. 파도 소리를 한참 같이 들었다. 창밖에서 뙤약볕이 쏟아져 내리는 한여름, 네모난 교실은 잠시우리의 해변이 되었다. 이어서 백석의 <바다>라는 시를읽었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중략)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 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 백석 <바다>
승건이에게 낭송을 시켰다. 낮고 다정한 음성이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교실에 울렸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 같은 반을 다시 들어갔다. 출석을 부르는데 승건이가 안 보인다! 오전에 바다 수업을 듣고는 버스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갔단다. 아니, 이 녀석이…. 어쩐지 멋있게 느껴졌다. 왠지 내 수업도 성공한 것 같았다.마음을 울린 게 분명하니까. 숱한 수업들은 다 흐릿한데 이날은 승건이도 나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승건이가 그날 본 바다는 무슨 색이었을까. 어떤 냄새가 났을까. 그의 세상은 얼마나 넓어졌을까.
아이들은 마음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한 시절을 살아가는중이다. 대항해시대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마음껏 넓히는중이다. 교사는 나침반이 되어 아이들 앞에 서 있다. 끊임없이 떨리면서도 지향을 포기하지 않는 나침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