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마재 사람들
나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퍼뜩 화가 장욱진의 그림을떠올렸다.
집과 나무, 아이와 동산 그리고 달과 새와 옹기종기 모인 마을, 쿨쿨 잠든 호랑이 등등, 뭐 이런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별마재.
이름만 들어도 순진해지고, 이름만 들어도 동심의 이야기가 마구 둥둥 풍선처럼 떠 오르는 느낌이다.
별마재란 별을 맞이하는 언덕이란 뜻이라 한다.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이름이 아니다. 이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 이름을 공모한 결과 ‘별마재’란 이름이채택되었다. 이름을 지은 이는 이 마을 주민인 화가 임은영 님이다.
지도엔 나오지 않는 별마재란 이름이지만 주민들은 이이름을 매우 사랑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마을 사람들은 마을 초입에다 <별마재 도서관>을 뚝딱 지었다.그곳은 책도 읽으면서 남녀노소 대화를 나누는 사랑방구실도 하는 공간이다.
사실 이 마을은 밤나무가 많은 동네라 하여 율문리라하였다. 그런데 고려 때 정승 박항이 낙향하여 사랑舍이들은 신북읍에 들어와 정착한 지 어언 스무 해를 넘기고 있다. 젊은이로 들어와 어느덧 사십 대의 나이가되어 있었다.
- 이웃
마을 주민들은 서로를 ‘이웃’이라 불렀다.
이웃이란 무얼까. 사전에 나와 있듯이 “나란히, 가까이있음, 경계가 서로 붙어있음”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의가족을 빼고는 가장 가까운 사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원래 이들은 외지인이 대부분이다. 어느 해부터 낯선이들이 하나둘, 이 언덕으로 모여들어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서로 눈치를 보다 마음의 빗장을 열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여기 마음에 드세요? 이렇게 조심스럽게 물은 뒤 저마다 품은 생각들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리고 어떤 데 관심이 있는지, 취미는 무엇인지,이곳에서 무얼 하면 서로가 즐겁겠는지를 이야기했다.음식도 나누게 되고, 서로가 마음을 열게 되자, 마침내廊채를 지어 살게 되면서부터 사랑말이란 이름으로도불리어졌다.
나는 신북읍 사랑말길을 고불고불 지나 부채 모양의낮은 언덕마을에 당도했다.
40여 호의 건물들을 두 팔에 안은 듯 연두색 나무들이바람결에 흔들렸다. 마치 초록 물고기들이 지느러미를파닥이며 유영하는 듯싶은 느낌이었다. 언덕마을은 장욱진의 그림에 나오는 기와집이나 초가는 보이지 않았다. 검은 지붕에 흰 벽채壁彩의 깔끔한 건물들이 오손도손 모여 있었다.
신북문화예술공동체의 장정훈 작가 겸 연출가, 그리고강한규 작곡가 겸 음악감독이 도서관 마당에서 환히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한다.
작곡가 강한규(왼쪽) 님과 작가 장정훈 님
별마재 마을축제를 열게도 되었다.
즐거움은 행복해짐이었고, 정을 나눔이었고, 마음의여유로움에서 오는 아늑함이었다.
즐거움은 생활의 활력을 주는 에너지가 아닌가. 이 즐거운 일을 하는 중심인물이 바로 작가 장정훈 님과 강한규 님이었다.
- 시작은 모험이었다
뭔가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해보자.
“뭔가…”
어느 날, 작가 장정훈 님이 스토리를 써 보이자, 이 스토리에 작곡가 강한규 님이 노래를 만들었다. 창작 뮤지컬은 이렇게 하여 탄생했다.
동네 공고가 났다.
신북읍 변두리 창작 집단 모집! 신북 사람이면 누구든오세요.!
할머니 한 분이 전화했다. 나이 제한이 있느냐고.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라고 물었다. 75세입니다. 이런 걸해보신 적 있나요? 없어요. 하지만 해보고 싶었어요.뭔가…해보고 싶었던 한 할머니의 용기는 모두에게 해일 같은 힘이 되어 주었다.
189일의 긴 여정.
2019년 뮤지컬 연극 <흰 사과나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민 30여 명이 생계의 절반을 잘라 뮤지컬에다 쏟아부었다. 연습은 낯설고 고통스러웠지만, 신선하고 가슴 뿌듯했다. 비록 서툴렀지만, 보람을 느끼는 시간이나날이 많아졌다. 서로를 다독이며 거듭거듭 연습했다. 하루하루의 성취감이 하루하루의 감동으로 바뀌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느끼게 되면서 자신의 존재가더할 나위 없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되었다. 저마다 가슴속엔 붉디붉은 보석이 별처럼 뜨겁게 반짝였다.
첫발을 내디딘 ‘신북면 주민 참여형 문화예술 프로젝트’는 이렇게 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잠시 쉬어야 했다. 3년 뒤 2022년 드디어 열정의 문화예술 프로젝트는 두 번째 연극 <알자스 지방의 세입자>를 무대에 올렸다. 19세기 프랑스 알자스 지방을 배경으로 한 블랙코미디였다. 연습 중에도 저절로 신명이 났고 흥겨웠고 재미가 있었다. 물론 이 뮤지컬 연극도 극본과 연출은 장정훈 님이, 음악은 강한규 님이, 미술은 화가 임은영 님이 맡았다. 그리고 주민 각자가 조명 및 여러 소품담당과 배우를 겸하면서 열심히 연습했고 무사히 연극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연극 <알자스 지방의 세입자>
관객들의 아낌없는 박수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다.바로 이듬해, 세 번째 창작 음악극 <에레나의 외갓집에서 온 당신>이 무대에 올려졌다. 이 연극은 소양댐으로 수몰된 마을 이야기였다. 50여 년 전, 고향을 버리고 떠나야 했던 신북면 주민들의 애환이 절절히 서린 연극이었다.
신북면에 사는 원주민 자신들의 이야기임은 물론이고,내 주변 이웃과 이웃의 이야기여서 가슴이 더욱 뭉클하고 감동적이었다. 기획 단계부터 모든 과정을 구성원 전체가 긴밀히 협업했다.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었다. 연습 중에도 눈물이 날 정도였다. 스물일곱 명이 모두 한마음이었다.
이 공연은 TV로도 방영되어 세간에 대단한 화제를 모았다.
평범한 삶의 과정을 살아가던 이들이 예술을 만났을때, 사람은 나무처럼 싱그럽고 거룩해지는 법이다.
- 겸손과 빛남
나는 이 마을에 보석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거론한 세 사람뿐만이 아니다. 곳곳에는 비밀스럽게 아름다운 보석들이 꼭꼭 숨겨져 있다는 걸 나는 느낀다.
예술을 통해 자신들의 영혼이 일깨워졌음을 알았을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마음으로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발견의 기쁨이고 친화임을 스스로가 알았다.
드러나지 않더라도 이미 이들은 겸손을 배웠고, 이미이들은 마음으로 모두를 안을 수 있는 포용심을 배웠다. 그리고 저마다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이분들은, 스스로가 빛을 발하는 주체자로서,아름다이, 동화 같은 별마재 신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