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가 되고 싶어요.”
십수 년 전, 진수의 진로 희망을 보고 나는 꽤 당황했다. 도시에서만 자란 새파란 신규 교사에게 ‘농부’는 미지의 세계였다.
부끄럽지만 농부라는 꿈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아이들의 ‘진로’는 여전히 교사에게도 어렵다.
어릴 때는 대부분 좋아하는 일을 장래 희망으로 삼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에 맞춰 학과를 선택하고, 진로 희망은 수시로 바뀌게 된다. 원하는 학과에 가기 위해 맞춤형 활동으로 ‘생기부’를 채우지만 정작 대학 원서를 쓸 때는 전혀 다른 학과에 지원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학년이 올라가며 관심사나 진로 희망이 변하는 건 당연한데 진짜 좋아서 학교 활동을 하는 건지,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건지 혼란스러울 때도 많다.
주말마다 서울로 학원을 다니며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은비는 원하는 대학에 떨어졌다. 졸업 후 찾아왔는데 재수를 하며 간호학과로 진로를 바꿨다고 했다. 취업이 잘되기 때문이라며 허탈하게 웃는다. 현실 앞에서 꿈을 미룬 스무 살이 마음 아팠다.
더 어려운 건 좋아하는 일을 못 찾는 경우다. 전교생이 참여하는 ‘꿈 설계 대회’에서 백지를 낸 학생이 있었다. ‘나는 꿈이 없습니다.’라고 눌러썼다가 그보다 더 꾹꾹 눌러 지우개로 지운 흔적. 멍하니 백지를 바라보며 괴로웠을 아이의 마음을 생각한다.
앞뒤 친구들은 사각사각 잘도 써내려만 가는데 뭐라도 적어야겠기에 연필을 들었지만, 힘겹게 쓴 그 말을 아이는 이내 지워버렸다. 좋아하는 것을 현실 앞에서 포기하는 것과 꿈을 찾지 못하는 것 모두 가혹한 일이다.
살펴보면 학교 다닐 때의 진로 희망이 직업이 되는 경우는 적은 것 같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평생 한가지 직업으로 산다는 건 점점 어려워질 텐데 학교에서의 진로 탐색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좋아하는 것을 찾고, ‘자아효능감’을 키우는 것이다.
자아효능감이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성공한 경험에 재미를 느끼고, 더 노력하며, 결국 더 잘하기 마련이다.
운동도 공부도 어릴 때 잘하던 아이가 쭉 잘하게 되는 이치다. 성취 경험의 선순환이다. 자아효능감이 높은 사람은 새로운 과제도 쉽게 받아들이며 잘할 가능성이 크다. 실패해도 금세 털고 일어날 수 있는 ‘회복 탄력성’도 높아진다. 반대로 실패 경험이 누적되면 과제에 흥미를 잃게 되고, 더 멀어지게 된다.
때문에 아이들은 작은 성취 경험을 반복하며 자아효능감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줄 세우는 상대평가에서 학생의 성취를 중시하는 절대평가로 바뀐 맥락이 여기에 있다.
자아효능감이 높다면 진정으로 원하는 진로를 찾는데도 도움이 된다. 수년간 고3 담임을 하며 아이들의 10년 후를 고민했는데 그건 내 월권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을 찾고, 자주 성공을 경험하게 하며, 튼튼한 뿌리를 내리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되었다.
졸업이 다가오면 수많은 감정이 일어난다. 원하는 결과를 얻은 학생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도 많기 때문이다.
인생은 길다고, 지금 결과가 다가 아니라고 위로하지만 쓸쓸함을 감추기 힘들다.
그래서 졸업하는 날 모소 대나무 이야기를 해주는데 아이들이나 나에게나 힘이 된다.
중국 극동지방에 자라는 모소 대나무는 매우 느리게 자란다고 한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정성껏 물을 주어도 4년 동안 겨우 몇 센티 자랄 뿐이다. 사람들은 허튼 짓을 한다고 비웃지만 5년째가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하루에 30센티 이상 ‘폭풍 성장’하는 것이다. 수십 미터 자란 모소 대나무는 몇 주 만에 울창한 숲을 이룬다. 사실 그동안 나무는 자라지 않은 게 아니었다. 수백 미터 튼튼한 뿌리를 땅속에 내리고 있던 것이다. 때를 만나 쑥쑥 자랄 때까지, 아름다운 꽃을 피울 때까지 너희는 학교에서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다고 이야기 해준다.
올해 새 학교에 발령받았다. 신규 시절 열정을 쏟았던 학교에 다시 왔다. 당시 함께 꿈을 찾던 아이들이 지금은 무얼 하고 사는지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튼튼한 뿌리를 내린 아이들은 삶의 순간마다 자아효능감을 발휘했다.
성적은 낮았지만 어릴 때부터 곤충에 진심이었던 지환이는 해박한 지식과 흥미를 바탕으로 곤충바이오센터에서 일한다. 밴드부 활동을 하던 산돌이는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었고, 활달한 성격으로 친구 관계가 좋았던 수현이는 능력 있는 마케터가 되었다. 그리고 진수는 결국 듬직한 청년 농부가 되었다. 특히 음악을 전공한 승현이는 임용고사에 합격해 음악 선생님이 되었는데 모교로 발령이 났다. 그러니까 우리는 학생과 선생님에서 동료 교사로 1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꿈을 이룬다는 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 아닐까. 좋아하는 일을 함께 찾고 뿌리 내릴 수 있는 기름진 땅을 일구는 일. 시간이 지나 저마다의 꽃을 피운 아이들 소식을 듣는 일. 교사의 큰 보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