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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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11

2025-04
#최돈선의둘레마을이야기 #봄내를품다
최돈선의 둘레마을 이야기 28
무궁화, 피어나라 대한민국
최돈선 시인. 춘천시 둘레엔 1개 읍, 9개 면이 있다.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 고요한 곳에 현자는 있을 것이다. 당산목 같은 우직한 당신의 사람들이.



- 한겨울의 시련

2025년 3월 1일, 나는 아파트 베란다에 태극기를 걸었다. 그리고 어릴 적 동요가 생각나 가만히 불러보았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그런데 축 늘어져 있던 태극기가 불끈 힘을 내어 펄럭이기 시작했다. 노래처럼 오래오래 바람과 놀았다.

창 곁에 놓인 무궁화 새싹도 덩달아 움찔하는 듯 싶었다.

아~ 지난겨울은 너무나도 혹독했다.

어둡고 두려운 밤의 나날이었다.

우리 시민 모두는 겨우내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그래, 펄럭이자. 우리 모두 신나게 펄럭이자.

가슴을 쭉 펴고 하늘을 우러르자.



작년 시월, 나는 무궁화 씨앗 열 알을 화분에 묻었다.

아니 하나하나 정성스레 심었다. 강원도 화목원에서 가져온 소중한 씨앗이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도록 아무 기척도 없었다. 빈 화분만이 고요했다.


12월 어느 날이다.

거대한 밤의 폭풍이 이 나라를 몰아쳤다. 그 폭풍은 난데없었지만, 시민들은 온몸으로 그것을 막아 이겨냈다.

그러던 12월 어느 날이다. 아침 창가 커튼을 열어젖혔을 때였다. 아내와 난, 와 소리를 내질렀다. 밤새 눈이 눈부시게 내렸다. 우리 아파트 앞은 남산초등학교가 바로 코앞이다. 운동장도 학교 지붕도 마을 건물들과 가로수도 온통 눈나라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창가에 놓인 화분에서였다.

눈여겨보니 빈 화분 한가운데 떡잎 하나가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었다.


새 주둥이 같은 놈이 금세 말을 걸어올 듯도 싶었다. 그러나 그 떡잎의 운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갓 두 돌 지난 외손자가 와서 그 앙증맞은 손으로 떡잎을 뜯어내 버린 것이다. 이제 가녀린 무궁화 대만 남게 되었다.

글렀는가. 우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내는 그래도 매일매일 앉아 가느다란 무궁화 대를 침묵으로 바라보곤 했다. 무언가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도 싶었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날도 커튼을 열어젖힌 아내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소복소복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창을 등지고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궁금하여 나도 들여다보니, 이게 웬일인가.

무궁화 대도 키가 자랐고 끝머리에 세 개의 초록잎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날이 흐르고 흘러 세 닢은 제법 이파리를 넓혀갔다. 물을 주면 방울방울 물방울이 맺혔다. 영롱함이 수정 같았다.한겨울의 시련을 견뎌낸 무궁화 대와 잎이었다.비록 떡잎이 뜯기는 상처를 입었으나, 그 상처를 스스로 아물어내고 꿋꿋이 선 나무였다.


- 3월 6일의 일기

어제 눈이 많이 내렸다. 오늘 아침부터 따스한 날씨에 눈은 금세 녹아 땅이 질척해졌다. 봄이라는 표시일 터였다.

나는 강원 화목원 묘포장의 무궁화들을 보러 갔다. 마른 겨울나무는 빈 들판에서 우뚝했다. 20년 된 나무도 3, 4년 된 어린나무도 모두 겨울을 잘 견뎌냈다. 400여 그루의 나무는 빈 몸으로도 의연했다.

우린 무궁해.

그렇게 나는 침묵의 언어를 그곳에서 들었다. 하늘이 더없이 푸르렀다.


강원화목원 묘포장의 무궁화나무


강원화목원 묘포장의 무궁화나무


-홍천강

나는 홍천강을 건넜다.

홍천강은 저항의 강으로 알려져 있다. 강 상류인 서석은 동학군 최후의 항쟁지였고, 바로 아래 동창은 삼일 만세로 피를 머금은 의거지였다. 여덟 분의 열사가 1919년 3월 1일 장날, 일본군 총칼에 꽃처럼 산화했다. 홍천강을 끼고 있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는 일제와 맞서 싸운 의병의 본거지였다. 가정리 윤희순은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의병이었다. 그니는 의병장 유인석의 조카며느리로, 중국으로 건너가 아들과 함께 독립 활동을 하다 돌아가셨다.


홍천 서면에 위치한 한서남궁억기념관의 남궁억 선생상


왜놈의 고문으로 죽은 아들을 부여안고서 열흘을 통곡했다. 그리고 윤희순은 마침내 쓰러져 아들의 곁으로 갔다.

내가 찾는 모곡리도 홍천강 유역이다. 모곡리는 남궁억 선생이 ‘무궁화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무궁화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그렇다. 무궁화라면 남궁억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남궁억은 무궁화의 상징적 존재로 우러러진다.나는 ‘한서남궁억기념관’에 우뚝 선 동상 앞에서 잠시 묵념한다. 그리고 염원한다.


결코 이 나라는 무너질 수 없습니다.

이 나라는 무궁화처럼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잔설이 남아 있는 무궁화동산.눈 덮인 겨울산 넘어, 바람이 오고 있다.

아,

봄이 온다.

- 무궁화는 단심丹心이다

무궁화는 단 하루를 산다.

아침에 이슬 머금고 피어나서 저녁이면 자기 몸을 돌돌 말아 떨어진다. 몸가짐이 단정하고 경건한 꽃이다.

그렇게 피고 지고 피고 지기를, 늦봄부터 가을까지 계속한다. 그러니 무궁하다는 뜻의 영원함을 지닌다. 겨울 한 철 혹한 속에서도 깊은 호흡으로 살아 숨 쉬는 나무가 무궁화이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 그 아들과 딸들, 그 자손의 자손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무궁함의 유전자가 무궁화엔 간직되어 있다.가지를 잘라 꽂아도 무궁화는 뿌리를 내려 잎과 꽃을 피운다. 그만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나무이고 꽃이다.


한서남궁억기념관 내 위치한 모곡예배당과 창살


그래서 나라꽃이다. 그래서 겨레의 나무이다. 그래서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나무요 꽃이라 부른다.


춘천엔 근화동이 있다.

무궁화의 옛 이름인 목근화木槿花를 따서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엔 무궁화가 많았던 마을이었던 듯싶다.

그런 마을에 경춘선 철로가 생기자, 일제는 무궁화를 모두 제거했다고 한다.

이제 다시 근화동의 골목과 거리와 철로 변에 우리의 무궁화가 피어날 꿈을 다시금 꾸어본다. 옛 전통을 다시 살림은 우리의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무궁화 한 그루 한 그루가 우리의 단심이요무궁화 한 송이 한 송이가 우리의 몸이요 마음이다영원히 불타오르는 자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