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긴 마을
인람리의 강은 벌써 해빙이다. 아니 이제 인람리의 강은 강이 아닌 호수이다.
1965년 정부는 인람리 바로 아래쪽 협곡을 막아 춘천댐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강은 호수로 변했다. 인람리 마을은 물속에 깊이 잠겼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인람리를 떠날 수 없는 십여 호만이 산기슭에다 새로이 터를 마련하고 집을 지었다. 그렇게 오랜 역사의 옛 인람리는 사라졌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드넓은 호수에 배를 띄워 물고기를 잡았다. 어느 날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밤이면 밤마다 잠긴 마을의 옛집 돌담과 그리운 얼굴들, 논두렁길과 마을 고샅길, 뒤란의 살구나무꽃들을 떠올리곤 했다.
38선
인람리와 가일리 유역은 낚시도구나 돌칼, 돌도끼, 토기 등의 선사 유물이 발견되던 곳이었다. 40여 년 전, 나는 춘천댐 부근에서 친구와 함께 낚시 중에 돌도끼류나 깨진 토기 조각을 발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제에서 해방된 한국은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38선이 그어졌다. 그에 따라 북한강은 이북의 화천과 이남의 춘천으로 갈라졌다. 인람리는 38선 경계선 아래쪽 마을이었다.
1950년 6월 25일 화천 쪽에서 북한군 전차가 인람리로 밀고 내려왔을 때, 죽음을 각오한 국방군의 강력 저지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지금 용산리(옛 102보충대 앞)엔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전차를 격파한 5인의 육탄용사 탑이 세워져 있다.
아베의 가족
그리고 30년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춘천댐이 생겨났고, 농부들은 어부가 되어 늙어갔고, 전쟁을 겪은 어른들은 유명을 달리했다. 그 어른들의 아이들이 성장하여 다시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1980년 6월 25일 인람리 마을 사람들은 mbc 6.25특집 드라마 <아베의 가족>을 보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배우 최불암과 김혜자가 출연한 이 드라마는 시청률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세간에 많은 화제를 남긴 작품이었다.
아프고…
서러웠다.
이 드라마는 굴욕이었고, 이 드라마는 지옥이었고, 이 드라마는 너무나 참혹했다. 전쟁이 인간을 죽이고, 전쟁이 한 가족을 윤간하고, 전쟁이 저마다의 마음과 몸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잔인한 폭력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었다.
이 드라마의 원작자는 춘천 출신 전상국 작가였다. 또 소설의 무대가 춘천시 사북면 인람리임도 작가에 의해 밝혀졌다.
17세의 눈으로 바라본 인람리
1957년 전상국은 춘천고등학교 학생이었다. 화천을 도보로 행군하던 학도호국단원 전상국은 오월리 초입을 지나게 되었다. 인솔하던 교관이 지휘봉으로 건너편 마을을 가리켰다.
“저 마을이 바로 38선 마을 인람리다.”
첫인상은 그저 평화로운 마을이라 생각했다. 당시는 댐이 생기기 전이어서 논밭이 제법 넓게 펼쳐져 있었고 평화로워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학청년 전상국은 깊은 사념에 잠겼다.외세에 의한 분단, 전쟁, 죽음과 고통!
생각건대, 그 뼈아픈 통각이 그의 영혼을 빛처럼 관통했었을 터였다. 아마도 문학이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순간이었을 것이다.
‘전상국 문화의 뜰’ 전경
‘전상국 작가 모습
‘물닭의 비상
댐이 생기고 마을은 물에 잠겨 호수가 되었다.
그 후 20여 년이 흘렀다. 소설가가 된 전상국은 인람리를 무대로 <아베의 가족>을 썼다. 소설은 문단의 화제작이 되어 그에게 문학상을 안겨주었고, mbc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함으로써 전상국을 일약 스타덤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전상국 작가는 만년에, 그가 쓰고 쌓아온 문학적 성과를 인정받아 예술의 정점인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다. 현재 그는 신동면 실레마을에 ‘전상국 문학의 뜰’을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인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겨울은 삼엄하나, 늘 살랑이는 바람과 여린 잎으로 허물어진다. 봄의 기운은 그렇게 오는 것이다.
고탄리를 지나 얕은 고개 하나를 넘으면 바로 인람리인데, 나로선 40년 만의 재방문인 셈이다.
오월리 쪽에서 친구와 배를 타고 건넜던 인람리는 낚시터로 유명한 곳이었다. 지금은 마을버스가 고탄리를 거쳐 하루 여섯 번 운행한다고 한다.
거대한 회색 구름이 덮인 날이다.
이따금 구름 사이로 장강처럼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그 틈새로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려 호수는 윤슬로 반짝인다.
갑자기 갈대숲에서 후드득 물닭이 날아오른다. 그리고 해빙된 호수 한가운데로 내려앉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유유히 유영한다.
인람리 버스 종점엔 아무도 없다. 집집마다 인기척 하나 없다.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겨우내 기슭에 정박해 있는 한 척의 배와 한가한 낚시터, 고요할 뿐인 마을회관도 아무 기척이 없다.
해빙중인 인람리 호수 모습
아~베~라는 외마디 말만 내뱉을 뿐인, 소설 속 아베도 물론 찾을 수가 없다.
전상국 소설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아베는 우리들 마음속에 잠재해 있다고.그 상처받은 아베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라고.그는 또, 수몰된 마을에 우리가 찾아야 할 우리 본래의 참모습이 아베의 이름으로 고요히 담겨 있을 거라고.그렇게 넌지시 작가는 우리에게 귀띔하고 있었다.
아 그런데 길 한가운데 한 마리 백구가 우뚝 서서 나를 맞이한다.
아니 무심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여기 주인은 나요, 하는 듯이.
낯선 사람에게 짖지도 않고, 으르렁거리지도 않는, 그 순박한 모습이 마치 아베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분단의 상처를 안은 마을 인람리.
그 호수 기슭으로 하얀 억새가 흔들리고, 그 곁에 키 큰 도깨비바늘이 곧추서 있다.
어린 시절, 이 도깨비바늘이 옷에 묻어 뜯어내던 날들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죽어라하고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는 도깨비바늘.그런데 놀랍다.
도깨비바늘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내 바지 끝에 도깨비바늘 한 개가 매달려 있지 않은가.
아 이것은.
혹시, 아•베•의, 잃어버린 영혼?
흔들리는 하얀 억새와 도깨비바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