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야! 외쳐 부르면
- 고은리, 그 그리운 곰실내
춘천엔 숨은 만화가가 있다. 그는 조용히 그림만 그린다. 모두가 잠든 밤. 고은리 온 마을과 산들에, 그리고 하얀 들판 위에 송이 송이 눈이 내린다. 백지 위엔 선을 긋는, 펜 소리만이 사각인다. 고요한 밤이고 깊은 밤이다. 물론 철수의 마당집에도 눈은 그렇게 소복소복 쌓인다. 그렇게 더 깊이, 눈은 쇼팽의 피아노 음표처럼 밤새 내린다.
<철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온 2020년 2월. 그때도 눈이 왔을 것이다. 나는 그날 이렇게 생각했었다. 그래. 이 그림은 너무 아득하구나, 내겐.
이 <철수이야기>는 만화이지만 만화가 아니다. 어린 시절의 동화이고, 오래 바랜 흑백의 사진이고, 가슴에 여울져 오는, 돌아올 수 없는 먼먼 아이들의 메아리이다.
우린 앞만 보고 살아왔다. 앞엔 미래가 있다고, 앞엔 꿈이 있다고, 앞엔 무한한 희망과 설렘이 있다고, 우린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아주 이따금 문득, 우린 고개 돌려 뒤를 돌아볼 때가 있다.
거기엔 조용히, 자신의 뒤를 따라 밀려오는 잔물결의 반짝임을 발견하게 된다. 아득하게, 전설처럼.
상수탕 만화가가 2020년 발간한‘철수 이야기 1, 2’ 표지
그 밀려옴은 얼마나 애타게 나를 부르곤 했었던가. 우린 그제야 그걸 알게 된다.
그 밀려옴은 또 다른 지난날의 경이로움이다.
미래의 설렘만큼 지난날들이 이렇게나 경이롭다니!
상수탕 작가는 고은리에서 났다. 고은리는 먼 조상인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때로부터 터를 이루고 살아온 곳이다. 선인들은 대대로 눈을 감은 뒤, 언덕 위 무덤으로 남아 몇 대의 자손들과 더불어 햇살과 눈을 맞아왔다. 이 흐르는 날들의 이치를 ‘지나는 바람’은 넌지시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삶과 죽음은 서로가 등지는 것이 아님을, 소슬히 이어가는 것임을, 그 자연의 이치를 무덤 곁 억새꽃은 가녀린 흔들림으로 보여준다.
고은리는 옛날 곰실마을이었고, 대대로 양씨 집성촌이었다. 하지만 상수탕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부터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다. 상수탕네 가족은 물론 작은아버지네 가족,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도 하나둘씩 정든 고향을 등졌다. 대신 외지인들이 하나둘 스며들어 이 동네의 주인이 되었다. 옛날 은둔의 마을이란 뜻의 고은리. 고은리도 다른 마을처럼 새로운 길이 생겨나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다.
만화가 상수탕 ⓒ 윤현
눈내린 고은리 모습
그러나 대룡산 계곡에서 내리는 맑은 물이 저수지를 이루고, 또 그 저수지 물길이 흘러내려 도랑물이 되어 멀리 공지천에 닿게 되는 일은 여전했다.
다들 어디로 떠난 것일까.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상수탕 작가는 나이 사십이 넘자, 자신의 일을 하고 싶어 춘천으로 귀향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싶어서였다.
상수탕 작가는 기억을 더듬어 그림을 한 장 한 장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철수야!
어느 날 상수탕 작가는 무심코 이렇게 불러보았다. 철수는 개의 이름이었다. 그러자 철수가 그림 속에 나타나 반갑게 달려들었다.
이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다시금 봄이 오자, 마침내 <철수이야기>가 탄생했다.
이 이야기엔 고은리의 사계절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짧은 옴니버스 형식의 단편 모음집은 비록 소소하나, 한 장면 한 장면이 정겹고 따뜻하다.
이 만화를 지금의 어린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이미 어른이 된 아이만이 지난날을 묵은 필름으로 회상할 수 있을 뿐.
당시 이 만화는 전국적으로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었다. 어른들은 만화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저마다 개와 마을을 떠올리며 오래 생각에 잠겼었다. 지금도 이 만화는, 사람들의 손길에 의해 한 장 한 장 넘겨지고 있다. 하루를, 열흘을, 백일과 천일을, 그리고 이천여 일의 세월을….
아주 천천히 읽어야 해. 아니, 아주 천천히 들여다보고 마음속에 담아야 해. 그래야 소중한 지난날을 조용히 불러올 수 있지. 가슴을 쓸어내리듯 이 책을 가만히 쓰다듬어 봐. 그러면 들려. 우리만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
눈이 온다. 함박눈이다.
2025년 1월 6일의 눈은 흡사 상수탕의 어린 시절의 눈처럼 아득하다.
나는 마을 길 ‘곰실공소’ 앞에서 철수를 만났다. 분명 만화 속의 하얀 개였다.
“철수야!” 내가 외쳐 부르자, 하얀 백구가 눈 오는 하늘을 쳐다보며 우우 짖었다. 마치 오래 기다렸던 상수탕을 만난 듯이.
안으로 들어가니 ‘곰실공소’는 소북이 눈이 덮여 있었다.
나는 건물 앞 석비에 쌓인 눈을 손바닥으로 쓸었다.음각된 글자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여기 곰실공소는 해마다 전국의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춘천교구의 요람지라고.
1920년에 세워졌으니, 무려 105년의 역사가 흘러온 셈이었다.
저쪽 눈밭의 고춧대 사이로 철수가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얘야, 나는 상수탕이 아니란다. 안 됐구나. 상수탕 작가는 며칠 전에 이 마을을 다녀갔지.
내가 상수탕 작가에게 말해줄게. 곰실공소에 네가 여전히 상수탕 작가를 기다리고 있노라고. 그때도 눈이 오게 될지는 모르겠구나.
며칠 전, 상수탕 작가와 나는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었다.
만화 '철수 이야기'속 컷 일부
만화 '철수 이야기'속 곰실공소 컷과 눈내린 현재의 곰실공소 모습
자신이 나고 자란 곳, <철수이야기>에 나오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터, 작은아버지 집, 철수와 멱을 감던 저수지, 긴 도랑, 철수와 뛰어놀던 곰실공소와 과수원, 언덕 위 밤나무 숲 등을 걸었다.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펑펑 함박눈이 멧돼지산을 적신다. 말태골은 더욱 깊어지고, 마을 지붕들은 납작 엎드려 있다.
사라진 철수의 발자국은 이미 지워지고 없다.
난 그냥, 겨울나무처럼 홀로 서 있을 뿐.오, 봄은 대체 언제 오려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