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0년대 이외수 작가는 샘밭에서 살았다. 그가 사는 곳은 마적산이 마주한 소양댐 하류였다. 소양댐 저층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차고 맑았다. 한여름에도 손을 담그면 손이 시릴 정도였다. 그는 80년 가을 중편소설 <장수하늘소>를 써서 그것을 이듬해 봄에 발표했다. 장수하늘소를 소재로 한 이 특이한 소설은 정교한 문학적 장치와 신비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하여 세간의 뜨거운 화젯거리가 되었다.
80년 늦은 여름, 내가 샘밭 이외수 작가의 집을 찾았을 때이다. 그는 허탈한 모습으로 내게 빈 소쿠리를 들어 보였다. 여기에, 여기에 장수하늘소가 있었어, 라며 이외수 작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아침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어.
내가 오기 이틀 전 밤에 홀연히 나타난 그 커다란 몸짓의 곤충은 장수하늘소라 했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었다. 정말, 정말이야? 장수하늘소가 나타났어? 나조차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더듬거린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새벽 2시쯤에 열린 방문을 통해 검은 물체 하나가 갑자기 침입해 들어왔다. 놈은 부우우웅 소리를 내며 방안을 이리저리 휘젓고 날아다녔다. 놈은 새가 아니었다. 몸집이 아주 큰 곤충이었다. 그러나 예사로 볼 곤충이 아님을 이외수 작가는 직감으로 알아챘다. 방문을 얼른 닫았다. 생포해야 해! 놈은 형광등 갓이나 벽에 걸린 옷가지, 장롱, 그리고 닫힌 문에 투덕투덕 부딪히면서 힘차게 날아다녔다. 놈은 한참 동안 그렇게 날아다니다 힘에 겨웠는지 잠시 방바닥에 내려앉아 숨을 골랐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이외수는 집게손가락을 조심스레 뻗어 놈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장수하늘소다!
이 생포 장면은 이외수의 작품 <장수하늘소>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는 오랫동안 장수하늘소를 손에 쥐고 들여다보았다. 가슴이 벅차고 뭔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희열감이 느껴져 왔다. 천연기념물인 이 곤충은 1973년 소양댐 건
설 이후 자취를 감춘 장수하늘소가 틀림이 없어 보였다. 날이 밝으면 임업시험장에 알릴 작정으로 소쿠리를 덮어 방바닥에 보호했다. 그리고 얼른 밖으로 나가 나뭇잎을 소쿠리 안쪽으로 밀어 넣어주었다. 그렇게 날이 밝을 때까지 이외수 작가는 장수하늘소와 같이 있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추곡마을 전경
오항리 버스타는 곳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날이 희부윰해질 무렵, 장수하늘소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외수 작가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물론 그의 아내가 소쿠리 곁을 꼭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어떤 기미조차 없었다고 했다.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꿈이었을까. 아니었다. 분명히 이외수는 지금도 손가락에 감촉이 남아있다고 했다.
이런 연유로 하여 이외수 작가는 가을 무렵부터 겨울 동안 장수하늘소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호수에 잠긴 옛 추전마을
2
2024년 시월의 마지막 날, 오항리의 아침은 드높이 맑았다. 산마다 골짜기마다 가을이었다. 춘천 가는 시내버스가 추전리 쪽에서 왔다. 아주머니 한 분과 아저씨 한 분이 탔다. 버스는 하얀 앙금의 햇빛 한 줌만 남긴 채 춘천으로 떠났다.
북산면 행정복지센터와 농협이 자리한 면소재지엔 열두어 채의 집만 눈에 띌 뿐 고즈넉했다. 골짜기마다 서너 너덧 채씩 들어앉은 북산면은 춘천에서 제일 오지인 지역이었다. 소양댐 건설로 인하여 북산면 인구는 뿔뿔이 흩어졌다. 면사무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북산면 인구는 960여 명 남짓이라 했다. 1971년 수몰되기 이전엔 1만여 명 이상이 살던 곳이었다.
이 지역의 내평리와 추곡리에선 청동기 유적과 유물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춘천교육대학교에 고인돌 1기가 옮겨져 있다. 추전리는 청동기시대부터 번영을 누려왔던 중심주거지였었다. 그 추전마을이 현재 물속에 잠겨 있다.
춘천교육대학교에 옮겨진 추전리 고인돌
나는 추전리 강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배터인 오항리 버스 종점에서 추전리까지의 5.3km는 아주 비좁은 흙길이었다. 나무들 사이로 검푸른 호수가 살풋살풋 내비쳤다. 길의 끝에 이르자 세 채의 집이 나타났다.
두 집은 호수와 가까이 있었고 한 채는 멀리 산기슭에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나는 40대 후반의 남자가 호두나무 밑에서 호두를 줍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다가가 여기 사시냐고 물으니 장모님 댁에 다니러 왔다고 했다. 단 세 채의 집에서 내가 유일하게 만난 분이었다.
나는 호수를 내다보았다. 저 호수 깊이에 오래된 추전마을이 있을 터였다. 골목과 돌담과 자두나무, 양지바른 언덕과 그 아래쪽으로 학교와 면사무소와 지서가 있을 터였다. 아이들의 재깔거리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올 터였다. 그리고 천연기념물 75호 장수하늘소 발생지라 쓰인 표지석이 있을 터였다. (조선총독부가 1942년에 세운 그 표지석은 위쪽 터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으나 사진만 남아있고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잔디가 깔린 이웃집 마당을 지나오다 깔끔하게 정돈된 양옥집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그리고 고요했다. 말소리가 들렸다면 분명 사람이 있었을 텐데 기척도 없었다. 또 누구세요?라는 소리가 들려오자 동행했던 한수지 님이 내게 말했다.
어디 먼 데 계시나 본데요?
알고 보니 그랬다. 빈집이었다. 이따금 들르는 별장으로 쓰는 집인 듯싶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가 들어선 모습을 화면으로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우리의 신분을 밝히고 여기 추전리를 둘러보러 온 사람들이라고 알려주었다.
우린 세 채뿐인 호숫가 추전리를 이렇게 쓸쓸히 떠났다. 장수하늘소는 그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3
나는 심일 후 혼자서 추곡리를 찾아갔다. 이외수의 소설에 나오는 장암산을 찾기 위해서였다. 사실 나는 안다. 이 지역엔 장암산이란 산은 없다는 것을.
장암산은 이외수가 장치한 상상의 산일뿐이었다. 잃어버렸던 장수하늘소가 발견된 산,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신선이 된 산이 장암산이었다.
나는 추곡약수터를 찾았다. 샘물은 사이다처럼 콕 쏘는 맛이었다. 약수터 바로 아래에 표지석이 있었다. 그 표지석은 1942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세운 표지석이 아니었다. 광복 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세운 이 표지석엔 <천연기념물 제75호 춘성의 장수하늘소 발생지>라고 음각되어 있었다. 뒷면에 조선총독부가 아닌 대한민국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1973년 추곡리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추전마을에서 이곳 추곡약수터에다 옮겨놓은 것이었다.
추곡약수터 모습
나는 믿는다.
졸참나무 상수리나무가 무성한 어느 곳일 터이다. 우리의 장수하늘소들은 그곳에서 은밀한 날갯짓으로 자유로이 날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작품 속의 추곡마을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오래오래 호수와 집과 먼 가을산을 바라보았다. 석양이었다. 그런데 문득 호수 건너 저쪽 대동리 쪽에서 하나의
산이 신기루처럼 희미하게 솟아올랐다. 아, 그 산은 장암산이었다.
석양을 받은 그 산은 이외수가 그려낸 장수하늘소의 산, 장암산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금빛 햇살의 장난일까. 장암산이 어느 순간 안개처럼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혹시 난 지금, 이외수의 소설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는 건 아닐까.
장수하늘소 발생지 표지석 앞/뒤면
추전리 끝마을에서 바라본 호수
최돈선 시인. 춘천시 둘레엔 1개 읍, 9개 면이 있다.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 고요한 곳에 현자는 있을 것이다. 당산목 같은 우직한 당신의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