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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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38

2019.3
#봄내를 만나다
3·1운동 기획 1
춘천의 3·1운동,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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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그날, 춘천도 일어섰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춘천에서도 만세운동이 있었을까?

그랬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당시도 춘천은 도청 소재지였고 강원도 경찰업무를 담당하는 헌병 사령부가 있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3·1 운동이 시작되자 1개 중 대가 대대본부로 확대되는 등 경비는 더욱 삼엄해졌다.


1919년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3월 1일 전에 서울의 3·1운동과 연락이 닿은 곳은 평강군(북한) 뿐이었다. 춘천에 독립선언서가 전해진 것은 3월 4일. 천도교 평강교구에서 독립선언서 150매가 임종한(林宗漢), 신윤철(申允喆)을 통해 춘천으로 보내졌지만 이들은 3월 4일에 여인숙에 있다가 전달도 못하고 붙잡혔다. 이때부터 만세운동을 하다 체포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동면 감정리 천도교인 윤도순(尹道淳)은 60세 나이에 3월 10일부터 14일까지 만천리, 가연리, 송암리 일대에서 독립의 식을 계몽하며 시위운동을 촉구하다 체포되었다. 3월 27일에는 신북면 청평리 주막거리에서 김봉희가 마을 사람을 고무하면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잡혀갔다.


이렇다 보니 춘천에서 만세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3월 말경이나 되어야 했다. 천도교 춘천교구장인 이준용(李俊容)과 북산면 조교리의 박순교(朴順交), 동면 장학리의 허기준(許基俊)이 협의해서 3월 28일 춘천읍 장날을 운동일자로 결정한 것이다.


3월 28일 춘천읍에서는 헌병과 수비대가 곳곳에서 삼엄한 경계를 폈다. 이준용, 박순교, 허기준은 태극기를 감춰 들고 장터로 왔다. 일제 군인들이 장터에 늘어서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세 사람을 중심으로 천도교인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때 장터를 경계하던 헌병보조원 허현(許鉉)도 총을 버리고 만세군중의 틈에 끼여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만세 운동은 크게 확산되지 못했다. 부근에 흩어져서 경계하던 수 비대가 달려와 시위의 불길을 살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던 이준용, 박순교, 허기준, 허현을 모두 체포해 간 것이다. 당시 춘천 장터의 상황은 일제 관리들의 위세에 눌려 수십 명 정도만이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을 뿐 의도하던 만큼의 대규모 만세 시위로까지는 퍼지지 못했다. 하지만 춘천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만큼은 전국 어느 곳 못지않게 뜨거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면 월송리에 위치한 호암 이준용 선생 묘소


땅은 내 땅이로되 나라를 잃었으니

주인은 나그네 되고 나그네는 주인 되었네

내 모든 것 혼을 부어 자주 독립 밑거름하니

광복의 그 날이 그 날이 오면 춤을 추세 춤을 추세


- 1920년 옥중에서 호암 이준용 선생이 남긴 시




1920년 옥중에서 호암 이준용 선생이 남긴 시

1919년 기미년에 대한 기억은 퇴계동에 위치한 국사봉(國史 峰·204m)에도 서려있다. 국사봉은 1919년 고종 황제가 승하하자 마음 놓고 통곡조차 할 수 없었던 춘천사람들이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정상에 태극단을 모으고 서쪽 하늘을 향해 고종의 승하를 애도하는 망제를 올리며 나라 잃은 슬픔과 울분을 달랬던 곳이다.


당시 망제를 주도했던 호암 이준용 선생을 기리고 선조들이 보여준 애국혼을 본받기 위해 1993년 국사봉 정상에 망제탑이 세워졌다. 비 전면 좌측에는 호암 선생이 1920년 감옥에서 쓴 시가 음각되어 있다.


현재 효자동에는 이준용 선생의 후손 이순호(61) 씨와 그의 가족이 살고 있다.

“제게는 증조부가 되시지요. 그러니까 제 아버지의 할아버지입니다. 원래는 중도에 사시다가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 위해 논밭을 팔고 서면으로 들어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서면 월송리에 산소도 있고 시에서 비석도 세워주셨어요.


선조들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셨으니 너희도 늘 마음을 바로 세우고 살라는 말씀을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듣고 자랐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편히 살 수 있는 것도 다 그때 우리 조상들이 나라를 위해 몸 바쳤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증조부님을 생각하면 늘 가슴 뿌듯하다는 후손 이순호 씨의 말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해마다 3·1절이면 유관순 누나를 떠올리게 되는데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만큼은 이준영 선생 등 우리 지역의 의병을 떠올리며 국사봉에 올라보는 것은 어떨까.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9권,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이준용 의병

(1860~1945)


호암 이준용 선생은 서면 출신으로 논과 밭을 팔아 독립자금으로 헌납하였고 방동리 자신의 집에서 의병들에게 의류와 숙식을 제공하였다.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민족 교육운동, 창씨개명 거부 등 한평생 조국독립을 위해 몸 을 바쳤다.


1919년 천도교 춘천교구장으로 있으면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윤도순(尹道淳)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비밀리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3월 28일 춘천읍내 시장에서 박순교(朴順 交)·허기준(許基俊)·허현(許鉉) 등과 함께 수십 명의 시위 군중들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시위 현장에서 헌병경찰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고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이후 공소하였으나 6월 11일 경성 복심법원과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호암 선생이 재판장에게 “나는 조선 사람이다. 도둑맞은 나라를 되찾겠다는데 무슨 죄냐?” 고 고함을 질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3·1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