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이 만나는 튀르키예는 문명과 역사의 요충지이다. 기원전부터 그리스, 로마제국이 문화를 꽃피웠고, 15세기부터는 강력한 오스만제국이 통치했던 땅이다. 그래서 볼거리가 정말 많다.
우리는 고대 로마 도시들을 여행했다. 데니즐리에 있는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부터 융성했던 고대도시다. 만 오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이 그대로 남아있을 만큼 거대한 도시였는데, 여러 번의 지진으로 많이 파괴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아름다운 조각과 거대한 건물의 기둥이 남아있는데 이천 년 전에 어쩜 이렇게 멋진 예술을 할 수 있었는지 경이롭다. 그늘 한 점 없이 섭씨 40도에 달하는 한 여름 고대도시는 타는 듯 뜨거웠다. ‘이천 년 전 로마의 여름으로 온 거야’라고 생각했다.
히에라폴리스를 가로지르면 그 유명한 파묵칼레가 나온다. ‘목화의 성’이란 뜻의 파묵칼레는 수만 년 동안 석회층이 쌓여 눈처럼 흰 지형에 새파란 온천수가 고여있다.
지형을 보호하기 위해 맨발로 걸어야 한다. 온천수 아래 석회 촉감이 진흙처럼 보드랍다. 지구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은 아름다움. 자연은 역시 위대한 예술가다. 신비롭고 신성하다.
튀르키예 남부 안탈리아 고고학 박물관에는 수없이 많은 동상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스신화의 신들과 황제나 당시의 유력자들을 동상으로 조각했다. 표정은 물론 머릿결이나 옷의 주름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는데 투박했을 돌덩이는 생명을 얻어 이렇게 수천 년간 살아있다. 여기 동상들은 근방의 페르게 고대도시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기어이 버스를 타고 페르게까지 가봤다.
동상은 박물관에 다 가 있어 건물과 기둥만 남은 고대도시에 전에 봤던 동상들을 상상으로 덧입혀야 한다. 거대한 상점 거리(아고라)와 온수와 냉수까지 공급되었던 공중목욕탕이 눈에 띈다. 전차 경주나 검투사의 잔혹한 결투가 열렸을 원형 경기장에는 그 옛날 시민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페르게에서 특히 놀라웠던 건 도시의 과학적 체계다.
도시 한가운데로 수로가 지나는데 정밀한 계산으로 경사를 두어 도시 전체에 물이 흐르게 했다. 단차로 유속을 조절해 이물질을 가라앉혀 깨끗한 물을 공급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상수도와 하수도를 구분해 설치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시간에 따라 문명이 진보한다고만 생각하지만 모든 역사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 모든 시기는 당시의 ‘첨단’을 살고 있었으리라.
시내로 돌아와 거리를 산책하다 멋진 건물이 있어 살펴보니 초등학교다. 관리인인듯한 아저씨가 손짓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영어는 통하지 않아 번역기로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번역기에 대고 뭐라 말씀하신다.
“우리 할머니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순직했습니다. 때문에 할머니는 고아로 자랐습니다.”
말로만 듣던 참전용사의 후손이구나. 무거운 마음으로 감사를 전했다.
“촉 테셰퀼에데림.”(정말 감사드립니다.)
숙소에 돌아와 ‘아일라’라는 영화를 봤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튀르키예 군인 슐레이만이 전쟁고아 소녀를 발견해 ‘아일라’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부대에서 사랑과 정성으로 키워내는 내용이다. 슐레이만은 친딸 같은 아일라를 고국에 데려가고 싶었지만 무산되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긴 채 수십 년이 흘렀다. 무려 60년이 지난 2010년, 한 방송사의 노력으로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우리나라보다 튀르키예에서 대흥행했다. 찾아보니 둘의 재회를 도운 방송사가 춘천 엠비시다. 이렇게 반갑고 신기할 수가! 내친김에 밤새도록 춘천 엠비시 다큐멘터리까지 다 봤다. 7,400km 떨어진 이역만리에서 눈이 퉁퉁 부었다. 튀르키예 군인들은 처절한 전투가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전쟁고아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고 한다. 부대 안에서도 보살피고 학교도 세워 이들을 배우게 했다. 왜 형제의 나라인지 이제 알겠다.
한여름 튀르키예의 밤, 달빛이 밝았다. 먼 옛날 로마사람들도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도 같은 달이 보이겠지. 아일라는 여기 말로 달빛이라는 뜻. 환한 아일라는 이천 년의 시간과 7,400km의 거리와 여행자의 마음을 넘나들며 빛났다.
김병현
지구별 여행자. 삶을 벗어나는 관광이 아닌 삶을 경험하는 여행을 지향합니다.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보다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