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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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04

2024-09
#최돈선의 둘레마을 이야기 #봄내를품다
여름, 중도의 깊은 곳엔


호수가 신연강이었을 때

의암댐이 생기기 전 춘천호는 신연강이었다. 신연강은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 삼각주를 이루었다. 삼각주의 땅은 비옥했다. 그리하여 신연강의 본류와 샛강의 지류가 어우러진 중도 유역은 농경사회 문화를 꽃피워 왔다. 청동기시대부터 중도 유역은 부족국가 형태의 도시로서 번영을 누렸다. 지금도 민무늬토기나 돌칼, 농기구 등이 발굴되고 있고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오랜 장마가 지속되고 있다.

모처럼 개인 날이다. 회색 구름과 흰 뭉게구름이 떠 있는 사이사이로 쨍하니 새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다. 

나는 북동서 삼면이 댐으로 둘러싸인 중도의 여름을 보기 위해 중도로 떠났다. 옛날엔 선착장에서 느린 배를 타고 건넜으나 이제는 큰 다리가 생겨나 걸어서 가거나 차를 타고 호수를 건넌다.

다리를 기점으로 위쪽은 상중도이고 아래쪽은 하중도로 구분된다. 

상중도는 비원의 숲으로 덮여 있다. 군데군데 숲으로 들어가는 황톳길은 숲 그늘에 덮여 적적하다. 버드나무와 벚나무 등 삼림이 우거진 사이로 샛강과 습지가 언뜻언뜻 스쳐 지나간다. 어느 곳은 메타세쿼이아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기도 하다.

길목엔 노란 달맞이꽃이 꽃잎을 접고 한가롭게 햇빛을 맞고 있다. 이 꽃은 잠들어 있는 게 분명하다. 밤이면 달맞이를 위해 녀석은 꽃잎을 스스로 열 것이다. 달이 뜨든 말든, 달맞이꽃의 주기는 언제나 일정하다.


숲길을 벗어나자 제법 너른 들이다. 이삭이 패기 시작하는 8월은 뜨거운 여름을 견뎌야 알곡이 여문다. 이삭거름을 준 논은 물을 뺀 뒤라 개구리밥이 갈라진 논바닥에 자욱이 덮여 있다. 파밭이 푸릇하게 농가 쪽으로 뻗어 있다. 모두 고요한 풍경들이다.

어디선가 숲에서 참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야!” 하고 내 눈앞에 불쑥 나타난 건 잘생긴 봉의산이다.

‘불쑥’이라기보다, ‘성큼’이라는 말이 맞을까? 그만큼 봉의산은 춘천 둘레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진산이다. 

참매미가 나팔을 부니 위엄을 갖춘 봉의산이 성큼 나타나 중도를 굽어본다. 

길가 풀숲에서 난데없이 푸드덕 회색빛의 새 한 마리가 숲 너머로 날아간다. 멧비둘기다. 그 날아간 자리를 유심히 살펴보니 조그만 숲의 터널이 빼꼼히 나타난다.






어른이어도 소년이다

소년일 적 나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은 적이 있다. 흑인 노예인 짐과 더불어 미시시피강을 따라 뗏목을 타고 내려가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모험의 이야기를 읽으며 문학의 꿈을 키웠었다.

내가 숲의 터널을 뚫고 내려간 곳은 고요한 샛강이었다.

비록 긴 강은 아니었지만, 그 샛강은 내가 만난 미시시피강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오래 상념에 잠겼다. 나의 상상은 나를 소년으로 돌아가게 했다.

아 그렇지. 저쪽 어디선가 허크와 짐의 뗏목이 밀려오겠구나. 나는 그런 환상에 젖는다.

호수 건너 서면엔 안개 자욱한 집을 그리는 화가가 있다. 

나는 상상으로 그 화가가 그리는 안개를 이곳에 뿌려본다. 그러면 안개가 몰려오는 샛강 끝에서 작은 배 한 척이 미끄러져 온다.

누군가 빛나는 옷을 입은 소년 하나가 이물에 서 있다. 

그 빛나는 소년은 놀랍게도 어린 왕자이다. 어린 왕자가 별나라에서 통통배를 타고 이 안개 짙은 환상의 섬에 나타나다니….

나는 상상을 지우고 시계를 슬쩍 살핀다.

한 사람이 하중도 생태공원으로 오게 되어 있다. 그가 올 시간이다. 그가 무엇을 타고 올지 나는 알 수 없다. 





이 사람

이 사람은 걸어서 중도로 왔다. 그는 보통 사람의 발걸음으로 하중도 생태공원에 들어섰다.

이 사람은 ‘중도리안’이다. 중도를 사랑하는 예술인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다.

중도는 청동기시대부터 문명을 이룬 부족국가의 중심지였다. 고인돌이 20여 기나 발굴되고 적석총 두 기가 발견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만큼 중도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황금의 땅이요 우리의 자긍심이라 할 수 있다.


춘천의 혼, 중도리안

그런데 이 황금의 땅이 파헤쳐졌다. 그 땅 위에 플라스틱 레고의 성이 순식간에 조립되었다.

공사 기간 중 몇몇 예술가들이 불도저가 땅을 밀어대는 황폐한 중도로 왔다. 공사 중에 발굴된 깨진 석물들, 토기들이 함부로 방치된 곳 바로 옆에서 이들은 행위예술을 시작했다.

유진규, 임근우, 전형근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의 몸짓은 무언의 항거였다. 

-레고랜드? 나쁘지 않다. 하지만 중도는 하지 마라. 여긴 우리의 혼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주변 어디든 레고를 세울 땅은 많다. 왜 하필이면 춘천의 심장에다 외국의 플라스틱 레고랜드를 꽂아야만 하는가. 가슴이 찔린 듯 아프다. 또다시 일제의 식민지가 된 느낌이다.



전형근 작가의 중도 퍼포먼스



그러나 이들의 항거는 공허한 메아리만 남길뿐이었다. 

반응은 덤덤했고 거대한 개발의 톱니는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중도 선사유적지 위에 세워진 레고는 부자들의 성이었다.

그러함에도 이들 중도리안은 지속적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듯 행위예술을 계속하고 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전형근. 그런데 무슨 일을 하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이 사람은 너무나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이다.

사진작가, 카메라 수집가, 실내건축가, 행위예술가, 영화배우, 음악가, 설치미술가, 일러스트, 문화기획자 등이 이 사람이 주로 하는 일이다.

지금 이 사람은 몇 달 동안 비밀의 장소에 은거하면서 소설을 쓰고 있다. 소설을? 그렇다. 이야기의 무대는 바로 춘천 호수와 중도이다.


이 사람은 그가 그려서 만든 ‘통통배612’를 타고 아무호를 떠다닌다. 아무도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없다. 

612를 붙인 이유는 어린 왕자의 별인 혹성612에서 따온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무호에는 아무어가 삽니다. 아무호엔 황금잉어도 있지요.

중도의 석관묘를 통해 지하 호수로 들어가기도 하고, 안개 깊은 날엔 아무호의 깊은 우물 안으로 잠입하기도 한다.

아마 그곳은 원시 고대사회로 드나드는 비밀의 통로가 아닐까. 중도리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비밀이 숨어 있음을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만 안다.

3부작인 이 방대한 소설을 나는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

나도 한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춘천사람이라면 한 번쯤 그런 꿈을 꾸어볼 수 있지 않을까.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호수는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춘천의 사람들아.

이 이야기를 허황한 공상이라 생각하지 마시라.

중도로 오라.

자유로운 상상을 통해 감성이 돋아나고, 새롭고 엉뚱한 세계를 맞이하리니.


중도에 오면 당신은 자유의 새가 되고, 은밀한 배가 되고, 호수 둘레 깊은 산의 메아리가 될 수 있다. 

새가 후드득 날아가는 그 자리에 비밀의 통로가 있으니, 꼭 그 통로를 지나 샛강을 찾으시길 바란다.


샛강 통로


1983년에 발견된 중도 고인돌






최돈선 

시인. 춘천시 둘레엔 1개 읍, 9개 면이 있다.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 고요한 곳에 현자는 있을 것이다. 당산목 같은 우직한 당신의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