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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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04

2024-09
#봄내인터뷰 #봄내를만나다
#역사소설가 길승수
천년 만에 양규를 데려온 역사소설가 ‘KBS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 원작자 길승수


올해 초 ‘고려거란전쟁-고려의 영웅들’이 KBS 대하사극으로 방영,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넷플릭스에서도 TV시리즈 부문 국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당대 고려를 둘러싼 사건,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인물들을 충분한 고증과 연구 끝에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냈다는 점, 서희와 강감찬 뒤에 가려졌던 고려의 명장 양규를 재조명하여 이순신 장군에 버금가는 또 한 사람의 위인을 회자하게 했다는 점에서도 이슈였다. 이 드라마는 춘천 출신 길승수 작가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역사에 묻혀 있던 기적의 전투 ‘고거전’을 역사 밖으로 꺼낸 길 작가를 춘천 시내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원창(고개)리 자택에서 만났다.

 

 



삼국지 좋아해서 열 번, 스무 번씩 반복해 읽던 소년 

역사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엄마가 사준 책을 다 읽고도 부족해서 백과사전을 정독할 정도였다. 아들의 인터뷰 현장에 함께해 준 길 작가의 어머니 김월자 씨는 “네 다섯 살때 부터 만화 가게에서 살았어요. 책이 없으면 안 되는 아이였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삼국지, 수호지, 열국지, 초한지, 영웅문 등 거의 모든 중국 역사소설을 섭렵했던 소년은 1998년 서울대 역사학과에 진학한다. “군 제대 후 입학했는데 결국 중퇴했어요. 사법고시를 준비했는데 1차를 붙으니 더 이상 하기 싫어지더라고요.” 그는 역사학과를 등졌던 자신이 어떻게 역사소설가가 되었는지 한 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춘천으로 돌아와 학원에서 초등학교 수학을 가르쳤어요. 하루는 지각한 아이에게 ‘성실해야 한다’고 타일렀더니 ‘선생님이 성실하게 살았다면 이 자리에 있었겠냐고 되묻더군요. 그 말에 충격을 받았어요.”그때부터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역사를 워낙 좋아한 길 작가는 30대 중반이었던 2009년 드디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10쪽 고려 역사를 1000쪽으로 살려낸 9년의 시간 작가에게 첫 소설의 소재를 고려로 정한 이유가 궁금해 물었더니 “조선시대는 눈물과 핍박의 역사잖아요. 우울한 게 싫었어요”라고 답했다. 고려거란전쟁은 성공한 역사다. 2009년 역사소설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 이 내용을 굳이 고른 이유도 거기 있었다. 고려 역사는 각종 실록이 전해내려오는 조선과는 달리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고려사 자료를 다 끌어모아도 ‘고려거란전쟁’ 관련 내용은 10쪽 내외다. 흥미로운 소재지만 누구나 쉽게 접근하지 못해던 이유다. 아무도 안 쓴 이야기라 더 관심이 갔다. 엄격한 사료적 증빙이 있어야 말할 수 있는 학자와 달리, 사료가 간단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 커졌기에 소설가로선 유리했다. 실제로 길 작가는 1년 만에 초고를 완성했다. 하지만 스스로 읽어봐도 “역사소설이 아니라 무협지 수준”이었다. “아 역사를 모르고 써서 이렇게 됐구나. 공부를 하고, 연구해야겠다는 결심을 그때 했죠.” 그는 고려 역사를 다룬 국내 사료뿐 아니라 고려를 둘러싼 거란과 송나라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중국 자료까지 파헤쳤다. 옛 한자를 하나씩 해석하고 은유적 표현을 꾸역꾸역 번역해가며 몰두했다. 집필을 시작하고 2018년 첫 책 고려거란전쟁 발간까지는 9년이나 걸렸다. 결국 누구도 건드릴 수 없던 1000년 전 역사는 길승수 작가의 집요한 연구와 상상력이 더해져 새로운 이야기로 거듭났다.

 

 


 

 

2009년부터 쓴 소설 마침내 빛 봐

하지만 아무 이름 없는 신출내기 역사소설가에게, 그것도 별 시장성 없어 보이는 고려시대를 다룬 책에, 유명한 서희도 강감찬도 아닌 양규를 전면에 내건 소설에 손내미는 곳은 없었다. 열 개 넘는 출판사에 글을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2019년 봄, JTBC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 촬영 현장

 


책을 쓰는 것만 생각했지 출간하는 법을 몰랐다. 글을 쓸 때는 자신 있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우울감이 찾아왔다. 그 시기쯤 (지인의 권유로) 네이버 웹 소설 코너에 소설 연재를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베스트리그 에 올라갔다. 팬이 생겨서 버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삼국지보다 재미있다’는 댓글을 믿고 그는 계속 글을 썼다. 기회는 우연히 왔다.

 

귀주대첩 1000주년인 2019년, JTBC가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를 제작하면서 그를 찾아왔다. 국내 유일한 ‘고려거란전쟁’ 책의 저자였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큐 자문과 대본작가로 참여, 이후 소설의 재출간, KBS드라마화까지 이어졌다. 새로 낸 소설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은 지금까지 10쇄를 찍었다.



 

“제가 천년만에 양규를 데려온 사람이래요”

고려거란전쟁은 1010년 거란의 2차 침공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인물들을 충분한 고증과 연구 끝에 흥미진진한 이야기 안으로 불러냈다는 점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양규라는 명장이 재조명된건 드라마가 가져다준 큰 성과다. 처음에 소설이 나왔을 때는 ‘양규가 누구야?’ 하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그는 “당시에는 차라리 서희를 먼저 쓸걸 하고 후회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블루오션이더라”라고 말하며 웃었다. 이제는 ‘양규’ 장군 이야기만 나오면 길 작가부터 찾는다. 사람들이 양규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내가 백성이라면 나를 사랑하는 지도자에게 당연히 열광하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역사를 알면 알수록 마음이 가는 인물이었다”라고 말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작가님이 역사 인물을 최초로 발견한 거 아니냐고 묻자 최근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국방부 군사사편찬위원회로 강연하러 갔을 때 한 청중이 그에게 말했다. “작가님은 천년만에 양규를 데려온 사람입니다”

 




*베스트리그: 네이버 웹 소설 코너 중 독자들의 인기를 받아 승격된 작품들이 모이는 공간


 


강감찬과 길승수, 인생이 닮았다

요즘도 그는 계속 글을 쓴다. 매일 오전 도서관이나 스터디 카페로 출근해서 저녁에 집에 돌아간다. 체력 관리를 위해 주짓수와 펜싱 같은 운동도 한다. 최근에는 강감찬의 귀주대첩 이후 이야기를 쓰고 있다. 강감찬은 서른여섯에 장원급제를 했다가 환갑이 지난 1009년 역사에 다시 등장한다. 입신양명을 꿈꾸며 장원급제까지 한 역사 속 인물은 큰 별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스스로를 갈고닦은 그는 결국 60대에 존재감을 드러내고 70대에 노구를 이끌고 전장을 달렸다. 혼란한 세상 속에서도 깨어 있었던 강감찬과 그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길승수 작가가 겹쳐 보였다. 작가가 밟아온 시간도 강감찬과 닮아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고려역사를 탐독하고 다져온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잘 몰랐던 고려거란전쟁을 알게 되었으니. 강감찬 이야기를 마저 써내고 나면 이번엔 임진왜란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고려거란전쟁이 블루오션이었다면 거긴 레드오션 아니냐, 주변에서 걱정하는데요. 전쟁과 전략전술의 리얼함을 묘사하는 건 제가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춘천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한마디를 물었다. “춘천을 배경으로 소설을 써보려고 했는데, 여기는 참 평화로웠더라고요. 좋은 동네에요. 춘천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지치고 힘들 때 왔는데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준 나의 고향에 늘 감사합니다. 시민 여러분, 제 책 꼭 읽어주세요. 하하”

 

길승수 작가의 역사 이야기를 더 읽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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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gilseung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