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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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03

2024-08
#최돈선의 둘레마을 이야기 #봄내를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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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정미소 가는 길



황조롱이의 눈

우리, 한 마리 새가 되어 보자.

춘천 어디에서 날개를 치든, 새는 날아오른다. 새는 자유다.

자유의 새는 하늘에 조용히 붙박여 춘천을 내려다본다. 당신 스스로 황조롱이라 생각하여도 좋다.

예전엔 신연강이었을 호수가 햇살을 받아 잉크빛으로 빛난다. 시간의 필름을 뒤로 돌리는 기술이 있다면, 당신은 이렇게 상상할 수 있다.

조선조 실학자 정약용이 돛배를 타고 아올탄 쪽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을.


삼악산과 뭇 봉우리들, 칠암촌(지금의 칠전동)을 지나 석문 밑 좁은 협곡에 다다른다. 고개를 쳐드니 바위 벼랑이 아득하다.


이 대목은 정약용의 <산행일기> 한 장면을 필자가 임의로 수정 발췌한 글귀이다.

황조롱이 당신이 내려다본 바론, 굽이지던 강줄기도, 서울과 춘천을 잇는 유일한 신연나루도, 선사시대 유적 마을도, 이젠 모두 호수 속에 잠겨 있다. 그냥 파란 거울 같은 호수만 반짝일 뿐이다.

그런데 산과 산이 맞닿은 지점에 이르면 물살은 거세진다.

1939년 그 협곡에 신연교가 세워졌고, 28년 후 그 신연교 자리에 의암댐이 생겨났다. 댐으로 가로막힌 물길이 차올라 호수가 되고, 그 수면 위로 붕어처럼 생긴 섬 하나가 비늘을 반짝이며 떠올랐다.

협곡을 이룬 서쪽 삼악산은 동쪽의 드름산보다 두 배는 키가 크다. 이 두 산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등산코스로 유명하다.

황조롱이 당신은 드름산 능선 둘레가 둥글게 타원형으로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분화구처럼 오목하니 파여 있는, 아무도 들어갈 엄두도 못 낼 비경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곳은 사람들이 들어선 흔적이 없다.

참나무 수림이 울창하여 접근하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수림을 보호하기 위해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된다는 안내판도 눈에 띈다.

그래서 등산객들은 주로 노을봉과 드름산 정상을 거쳐 능선을 따라 의암봉으로 간다. 그곳엔 탁 트인 전망대가 있다.

눈을 들면 호수와 호수 건너 삼악산 봉우리와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 멀리 마적산까지 내다보인다. 누구든 이 아름다운 풍경에 어찌 넋을 놓지 않겠는가.


하지만 황조롱이 당신은 그것에 넋을 놓아선 안 된다. 드름산에는 묘하게도 숨겨진 두 개의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숨겨진 비밀의 마을이라고? 어찌 호기심이 일지 않겠는가? 따라가 보자. 문득 당신은 능선 숲 사이로 바위산을 오르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다. 그들이 가는 길은 숨겨진 마을인 의암마을 쪽이 아니라 모오리길로 꺾어진다. 한봉 아래쪽에 또 하나의 숨겨진 마을이 있는 것이다. 그 마을 이름이 팔미리이다. 물론 지도엔 옛길 그대로 ‘모오리길’로 주소지가 표시되어 있다.


모리정미소

서울 방면에서 춘천 쪽으로 진입하다 보면 사거리가 나타난다. 동서남북 십자형의 길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는데, 북향은 춘천 길, 동향은 학곡리길, 남향은 팔봉산 길, 그리고 서향이 서울 길이다. 그 근처 길옆에 규모가 큰 모리정미소가 자리 잡고 있다.



(위)모리정미소와 진호선 이사




평화로운 마을이다. 아니 적막하다. 30여 호의 집들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마을길엔 옥수수가 익어간다. 모리 정미소는 75년의 오랜 역사를 지녔다.

처음엔 진호선 이사의 할아버지가 정미기를 지게에 지고 농가를 방문하여 낟알을 찧고 쓿었다. 가업을 이어 기반을 탄탄히 다진 이는 현 대표 진의균 씨이다. 이젠 그의 아들 둘이 정미소 일을 맡고 있다. 직원은 단 3명뿐이다. 수천 평의 대지에 엄청난 양의 곡물을 처리하는데도 인력이 3명뿐이라니 내심 의아했다. 그 이유는 모든 공정이 자동화되어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하여 진의균 대표는 운영 일체를 두 아들에게 일임했다. 넓은 정미소는 깨끗하고 정갈한 느낌이다. 어디 하나 어지러운데 없이 잘 정돈되어 있다. 어디서 나타나 금세 사라지는지 수시로 자동차가 드나들며 곡물을 실어 나른다.

갓 도정한 쌀은 밥맛이 좋다 하여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직접 찾아와 보리쌀, 서리태, 팥, 흑미 등의 알곡을 사 간다. 특히 고객의 주문에 따라 현미를 12분도까지 세분화하여 도정해 준다. 물론 택배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마을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에겐 통행이 자유롭지 못함을 금세 알 수 있다. 춘천에서 진입하기엔 바로 길옆에 진입로가 있어 들어가기 쉽지만, 나갈 때는 댐 쪽으로 돌아가거나 삼악산 입구 근처에서 우회전하여 돌아가야 한다.

이 마을은 거대한 모리 정미소만 언뜻 눈에 띈다. 그래서 마을 집들은 군데군데 떨어져 모리정미소 뒤에 숨어 있다. 큰 도로가 가까이 있음에도 마을에 들어서면 드름산의 바람결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그런데 새로운 집들이 자꾸만 지어지고 있다. 전국의 마을마다 빈집이 늘어나는 터에 이곳은 한 채 두 채 슬금슬금 집들이 들어선다.

그만큼 이 마을은 뭔가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적인 요소가 잠재해 있는지도 모른다.


길모퉁이 공방의 새

그는 오늘도 나무를 깎는다.

아니 나무로 새를 깎는다. 의자와 탁자도 만들고, 나무로는 그 무엇이든 다 만들어낸다.

그는 나무새 깎는 사람이다.



8mm 나무공방 전경과 권용훈 씨



그는 “그저 소일거리 삼아”라며 이야기한다. 아버지가 목수여서 어릴 적부터 나무 깎는 일을 보아왔다고 한다. 아버지의 손놀림을 이어받아 솟대랄 것도 없는 새를 깎는다. 기러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황조롱이 당신이라 해야 할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마음의 새>라는 이름을 뇌며 빙그레 웃었다. 그도 덩달아 웃었다.

활짝 트인 나무공방은 삼면 벽이 공구와 새들로 가득 차 있다. 드름산으로 오르는 초입새와 동네로 들어서는 길목 조그만 공터엔 황국이 샛노랗게 피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길목을 지나야 자기 집으로 갈 수 있다.

권용훈 씨. 그는 나무를 깎으며 마을을 지키는 문지기인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른다.

왜 이분이 공방에서 새를 깎는지, 왜 저녁마다 늘 앞산인 금병산 너머를 바라보는지를.

그렇다. 마음은 황조롱이가 되어 태백산맥 넘어 포항 부두에 가 닿는다.

그곳에 노령의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다.

드름산 땅거미가 팔미리 길과 들판을 적실 때면, 그는 망연히 앞산 너머를 쳐다본다.

어머니는 자기 고향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여기가 내가 누울 곳이야.

직장 때문에 멀리 떠나 아예 춘천에 정착하게 된 그는, 저녁이면 한 마리 새가 되어 먼 저녁 하늘을 나는 것이다.



보리수 따는 마을 주민들


8mm찻집




그의 살림집은 공방 바로 위에 있고, 그 곁에 아내가 운영하는 카페 <8mm>가 있다.

한낮에도 오렌지빛 백열등이 마당에 오밀조밀 늘어선, 은은한 카페 <8mm>. 1cm도 안 되는 아주 가까운 사람끼리 서로서로 귓속말을 나누는 카페는 깃털처럼 아늑하다. 권용훈 목공예가와 윤현 사진작가, 그리고 나는 한잔의 커피와 차를 마신다.

카페 창을 통해 마당과 길, 모리정미소와 팔미리 들판 저쪽의 금병산을 내다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니 시간이 정지되어 있었나 보다.

윤현 작가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부부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도랑 길가엔 빨간 보리수 열매가 농익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릴 흘낏 보더니, 바구니에 담긴 보리수 열매를 말없이 건넨다. 상냥한 웃음은 보너스다.

참 달콤하고 향기로운 맛이다.

아유~, 여름이 이렇게나 잘도 익었다니.





최돈선 

시인. 춘천시 둘레엔 1개 읍, 9개 면이 있다.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 고요한 곳에 현자는 있을 것이다. 당산목 같은 우직한 당신의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