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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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02

2024-07
#앉아서 세계속으로 #봄내를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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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초록으로 그린 수묵화



발리에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발리는 인도네시아 수많은 섬 중 하나인데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친절한 사람들로 유명한 곳이다. 발리는 아름다운 해변, 서핑의 천국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내륙에는 열대우림과 논밭이 펼쳐져 있기도 하다. 나와 아내는 섬 중앙 우붓이라는 지역에 집을 구했다. 우붓은 시끄럽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좁은 도로에는 차와 오토바이가 질서 없이 뒤섞여 있다. 이들은 수시로 중앙선과 갓길을 넘나들며 추월한다. 신호나 횡단보도는 물론 인도가 없는 곳도 많아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조심히 걸어야 한다. 

하지만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서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초록으로 그린 수묵화 같은 논밭이 드넓게 펼쳐지고 그 끝에는 야자수 숲이 보인다. 거기에는 계곡과 밀림이 있을 것이다. 산도 높은 건물도 없어 하늘은 광활하게 모습을 다 드러낸다. 한낮에는 하늘 높이 솟은 솜사탕 구름이 천천히 흐르고, 해가 뉘엿거릴 즈음에는 황금빛으로 세상이 물든다. 새와 박쥐가 춤추고, 풀벌레와 도마뱀이 울면 마침내 남반구의 별들이 총총 빛난다.





한 달 동안 논밭을 산책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매일 초록 들판과 노을을 보고, 빗소리를 들었다. 눈과 마음이 순해졌다. 아내와 주로 집에서 요리를 해 먹었는데 단골이 된 야채 가게에서 배추와 생강, 마늘을 사고, 액젓을 구한 뒤 챙겨간 고춧가루로 김치를 담갔다. 여행의 질이 높아졌다.

발리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정하고 여유롭다. 미소 띤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네준다.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면 특히 반가워하는 것 같다. 택시 기사들은 유쾌한 기운을 준다. “도로는 항상 막히지만 그래야 경제가 돌아가죠!” 넘치는 관광객이 성가실 법한데도 친절하다. 환대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의 시공간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 같다. 춘천의 여행자들을 조금 더 환대해야겠다 생각했다. 

발리인 대부분은 힌두교를 믿어 크고 작은 사원이 정말 많다. 말레이시아에서 본 요란한 힌두 사원과 다르게 이곳은 짙은 먹색 돌로만 건축되었다. 단색이라 소박하면서도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었다. 힌두에는 십만이 넘는 신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만큼 동상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사람들은 전통 의상을 정갈히 입고 사원에서 기도를 올린다. 이들은 매일 차낭사리를 만들어 집 앞과 거리에 두기도 한다. 야자수 잎을 손바닥 크기로 엮은 뒤 꽃과 과자 등을 올린 제물이 그것이다. 그들의 성품처럼 담박하다.







하루는 사원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 들어가 보았다. 경건한 분위기에 한쪽에서는 무언가 태우는 불길이 보인다. 눈 마주친 분께 조심스레 물었다. 

“이건 무슨 의식인가요?” 

“죽음 이후에 육신을 불태우는 의식이에요.” 

“장례식 같은 건가요?” 

“맞아요. 돌아가시면 일단 매장해 두었다가 돈을 모아 이렇게 화장(火葬)을 해요. 그 재는 바다에 가서 뿌립니다. 인간은 물에서 왔기 때문에 다시 물로 돌려보내는 거죠. 그럼 다시 태어날 수 있어요.” 

“그렇군요. 오늘은 누구의 장례식인가요?” 

“우리 할머니예요. 오늘은 좋은 날이에요.”

길일이라는 건지, 슬프지 않은 날이라는 건지 헷갈렸지만 둘 다일 것 같았다. 이곳에서는 윤회를 믿고, 죽음이 곧 삶이라고 생각한다기에. 끝은 곧 시작이라는 믿음. 너는 내가 되고,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가르침. 낯선 여행자에게 귀한 것을 알려준 그에게 합장을 하고 나긋하게 말했다. 

“뜨리마까시”

발리에서 가장 많이 쓴 말이 ‘뜨리마까시’(감사합니다)이다. ‘뜨리마’는 ‘받다’는 뜻이고, ‘까시’는 ‘주다’는 뜻인데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 그것이 

감사의 의미였다. 공손하게 ‘뜨리마까시’라고 말하면 ‘사마사마’하고 대답해 준다. ‘나도 그래’라는 뜻이다. 공감과 교감의 언어다. 다정한 사람들과 마음을 주고받는 곳. 넘치는 초록과 교감하는 곳. 사람들의 생활이 분주하게 지나고, 매일 생명이 자라나는 아름다운 신들의 섬 발리에서 다시 오지 않을 여행 시절을 보냈다.







김병현

지구별 여행자. 삶을 벗어나는 관광이 아닌 삶을 경험하는 여행을 지향합니다.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보다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