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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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02

2024-07
#봄내인터뷰
연극 연출가 겸 배우 장혁우
오늘, 연극 보러 갈래?
연극 연출가 겸 배우 장혁우


장 혁 우

연극 연출가 겸 배우. 1982년 춘천 출신. 강원고등학교 연극부를 시작으로 연극인생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청소년 극단 무하를 만들고 강원대학교 후문에 소극장을 만들기도 했다. 연극 「은밀한 연애(연극 바보들)」, 「브릴리언트」, 「썸데이」의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춘천에 없던 말 ‘오늘 연극 보러 갈래?’를 만들기 위해 25년째 한길을 파는 사람이 있다. 연극 연출가 겸 배우 장혁우 씨다. 무대에서는 연기를 하고 무대 밖에서는 극의 대본을 쓰고 직접 연출도 하며 춘천과 서울 대학로를 오고 간 지는 5년째. 그 결실로 강원대학교 후문에는 소극장 ‘연극바보들’을 , 대학로에는 소극장 ‘무하아트센터’를 오픈해 운영하고 있다. 연극보다 더 드라마틱한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방황했더니 주인공?! 

청소년 장혁우는 또래처럼 연애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연애편지도 곧잘 썼다. 친구 대신 쓴 연애편지의 성공률이 높아지자 글 쓰는 것에 흥미가 생겼고, 강원고등학교 1학년이 된 장 씨는 문예부에 들어가려고 마음먹었다. 문예부에 들어가려면 창작 시 5편을 제출해야 해서 몇 날 며칠 고심하며 시를 썼고, 드디어 합격을 통보받았다. 

“합격 통보를 받은 날, 학교 복도를 지나는데 3학년 선배가 저를 불렀어요. 그러더니 ‘너 동아리 뭐야, 오늘부터 연극부 들어와’ 하더라고요. 싸움을 제일 잘하는 무서운 형이었거든요. 그래서 들어간 연극부였는데 그게 제 삶을 바꿔놓을 줄 몰랐죠.”

얼떨결에 들어간 연극부에서 첫 대본을 손에 쥐자마자 대본을 하루 만에 외우며 연극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연극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다른 학교 연극부와도 활발히 교류하며 졸업할 때까지 열 개가 넘는 다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전문 배우가 되는 방법을 몰랐다. 정보가 부족했고, 부모님도 반대했다. 그렇게 대학 진학에 실패한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군대로, 한 번은 원치 않았던 대학으로 도망갔다. 그렇게 게임과 술로 절여진 방황 속에 어느덧 28살이 되었다. 

“아직도 기억나요. 28살 10월이었어요. 제가 돈이 없으니까 친구들이 돈을 대신 내줘서 여러 명이 제주도에 놀러 간 적이 있어요. 거기서 친구 한 명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야, 너 진짜 돈이 없어서 연극 못 해본 적 있어?’ 여기에 뒤통수가 띵 했죠. 그동안 내가 돈이 없어서 꿈을 못 이룬다고 말했던 건 핑계였구나. 정신 차리고 춘천으로 돌아와서 극단을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장혁우 씨는 여러 극단에 무작정 전화해 배우를 하고 싶다며 오디션을 보러다녔다. 그렇게 2009년, ‘문화프로덕션 도모’라는 극단에 들어갔다. 첫 작품 연습을 시작했지만, 베테랑 배우들이 주로 무대에 섰다. 혁우 씨는 신인이었기 때문에 연습은 하되 무대에 오를 일은 거의 없는 일명 ‘만년 대기’조였다. 그러다 공연 며칠 전, 주인공 역의 선배가 일 때문에 연습에 참여 못 하는 일이 생겼다. 공백을 메꾸려 연습 무대에 올랐다가, 대본을 완벽히 외워 열정적으로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됐다. 이게 실제 공연에서도 주인공 자리를 거머쥐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그는 3년 내내 다양한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게 된다.




장혁우 씨가 연기 지도하는 모습




나에겐 동료가 필요해, 너희에겐 버팀목이 필요해 

극단에 들어간 장혁우 씨는 물 만난 고기처럼 역량을 펼쳐나갔다. 공연을 위해 매일 15시간씩 연습하면서 온 신경을 연극에 몰두하면서 보냈다.

“하루는 강원연극제를 준비하고 있는데 연습실에 고등학생이 한 명 구경하고 있더라고요. 연습하느라 정신없으니 신경을 못 썼어요. 그런데 일주일 넘게 있길래 왜 있는 거냐고 물어봤어요. 연극영화과에 가고 싶은데 배울 데도 없고 방법을 모르겠어서 구경만 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또 한 번 머리가 띵 울렸죠. 10년 전 제 상황과 너무 비슷해서요.”

연습실에서 구경하던 아이에게 물어보니 이런 친구들이 꽤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장 씨는 작은 단체를 만들어 무료로 연기 지도를 하게 된다. 2012년, 청소년 극단 무하의 탄생이다. 1년에 10명씩 뽑아 운영했다. ‘무하’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들며 공연을 하러 다녔다.


무하가 6년 차 되던 해 돌아보니 무하 졸업생이 63명인데 그중 33명이 연극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4대 보험에 가입되어 일하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장 씨는 그동안 노력한 것들이 거품이 되지 않게 시스템이 갖춰져야 예술 분야 종사자가 지속성을 갖고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19년, 그는 ‘내 동료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후배들의 ‘버팀목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하를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했다. 공연만 하던 단체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회사를 만든 것이다. 이후 무하의 지속성을 위해 강원대학교 후문에 연극을 상시 볼 수 있는 소극장을 만들었다. 소극장 ‘연극 바보들’은 문을 연 지 4개월 반 만에 유료 관객이 1만 명을 넘겼고, 연달아 180회 공연을 치르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나만 포기하지 않으면, 모든 건 과정 중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코로나 직격탄을 맞으면서 관객이 사라졌다. 춘천에서 극장을 만들고 연속 공연을 올리면서 달콤한 성공을 맛봤기에 가만있을 수 없었다. 장 씨는 대안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공연을 서울로 역수출 해보자는 생각을 했고, 대학로로 가 극장을 빌리고 배우를 모집했다. 직접 만든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매일 뛰어다녔다. 오히려 코로나로 실력 있는 배우들로 팀을 꾸릴 수 있었고 음악극 「브릴리언트」, 연극 「춘천놈들」, 뮤지컬 「썸데이」가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면서 서울에서 입지를 다지게 됐고 연출가로서의 그의 가치도 높아지게 됐다.

“코로나 시기에 적극적으로 움직였던 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하나의 공연을 준비하고 마칠 때까지 몇 달 치의 극장을 임대하는데, 임대료도 많이 나가고 세트를 부수고 새로 만드는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저희만의 전용 극장이 있어야겠더라고요. 빈 상가를 임대해서 우리 전용관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준비해서 올해 3월 대학로에 문을 연 게 무하아트센터예요.”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소극장 무하아트센터 외관과 내부 모습




서울에서 자신감을 얻은 장 씨는 문득, 고향도 춘천이고 예술 분야 지인도 춘천에 많아 이제는 춘천에서 오픈런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쉬고 있던 소극장 ‘연극 바보들’이 올해 6월 재가동을 시작했다.


“춘천에서 오픈런은 아마 최초일 거예요. 오픈런은 일단 공연을 시작하면 종료 기한 없이 무기한으로 공연하는 걸 뜻해요. 저희가 공연을 중단하지 않는 한, 붙여뒀던 공연 홍보 포스터를 떼지 않아도 되는 거죠. 일단 지금은 주말 공연만 있는데요. 반응을 보고 조금씩 늘려 나가고 싶어요. 춘천에서도 아무 때나 ‘우리 심심한데 연극이나 보러 갈까?’ 했을 때 저희가 그 빈자리를 채워드리고 싶습니다.”


혁우 씨는 방황도 오래하고 새로운 길을 만드느라 외로운 길을 걸으면서도, 태어나서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나만 포기하지 않으면 과정 중에 있다고. 언젠가 성공할 거라고.® 




강원대학교 후문에 위치한 소극장 연극바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