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외환은행에 근무하던 그는 1997년 북한 함경남도 신포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북한 경수로사업 관련 업무 때문이었다.
당시 북한은 자연재해와 국제적 고립 등으로 식량난과 아사자가 속출했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
그는 직원 2명과 함께 1999년까지 2년 남짓 북한에 머물면서 북한 주민들의 고단한 삶을 목도한다.
2003년 외환은행 부행장으로 퇴직, 30년 금융인 생활을 정리한 그는 강남대 사회복지대학원에 진학해 사회복지사로 ‘제 2 인생’을 시작한다.
현재 북한 이탈 청년들의 직업교육과 정착을 돕고 있는 해솔직업사관학교 김영우 이사장(72)의 이야기다.
“북한 이탈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 등이 서울에 5~6군데 있죠. 대체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대학진학을 돕는 선에서 그칩니다.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는 남한 아이들과 경쟁이 안 된다는 점이죠. 그런 상태로 사회에 진출하다 보니 정착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죠.”
2005년부터 서울에서 ‘셋넷학교’ 등 북한 이탈 청소년 교육기관에서 활동했던 그는
학과 공부와 함께 기술을 가르쳐야 성공적인 정착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던 차 2013년 강원도에서 탈북청년들을 위한 직업교육기관 설립을 그에게 타진해 왔다.
“이듬해인 2014년 춘천 석사동에 해솔직업사관학교를 설립했죠. 당초 강원도가 약속했던 지원은 관련 조례 문제로
몇 년 후부터 이뤄졌기에 초창기 3년 동안 학교 건물 빌리고, 기숙사와 교사 구하고, 학생을 모집하는 모든 작업과 경비를 거의 혼자 해결해야 했죠.”
그렇게 몇 년간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뜻을 함께하는 지인들과 관련 단체, 기업이나 개인들의 후원이 늘어났다.
대학총장, 교육장, 학교장 등등 화려한 경력의 과목별 특급 교사들도 대부분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지식과 인격 함양을 함께 가르치는 학생 개개인의 특성에 따른 맞춤형 교육을 합니다.
교육과 숙식 모두 무료로 제공하며, 폴리텍대학이나 전문학교에 진학해 기술을 익힙니다.
어느 집단에서건 반드시 1등을 해서 후원자들의 도움에 보답하라는 게 유일한 요구사항이죠.”
새로 마련한 교사에서 학생, 교직원들과 함께
해솔직업사관학교란 이름은 해처럼 밝고 소나무처럼 꿋꿋하게 성장해 장차 통일시대의 사관士官, 즉 리더가 되라는 뜻이다
남학생만 선발하며 입학조건으로 술·담배를 금지한다.
개교 7년째를 맞은 올해 초 퇴계동 808번지에 강의실, 기숙사 식당 등을 함께 갖춘 4층 건물을 신축, 석사동 시절을 마감했다.
재학생은 현재 총 63명. 이 가운데 30명은 공부 중이고 33명은 이미 직장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재학생이다.
마치 부모가 자녀의 독립을 지켜보듯 취업 후 결혼까지 해야 비로소 정착했다고 판단해 졸업생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춘천시민들의 온유함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단 한 번의 분쟁도 없었어요.
북한 출신 청년들에 대한 거부감 등이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었는데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