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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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00

2024-05
#교실에서 보낸 편지 #봄내를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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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힘



1학년 아이의 그림일기. 아이가 병원에 입원하신 할머니를 그렸다. 파란 환자복을 입은 할머니 손등에는 링거 주사가 꽂혀 있다. 그런데도 웃는 표정이시다. 할머니 옆에는 아이가 있다. 아이의 눈엔 커다란 눈물방울이 맺혀 있다. 그림을 그리다 더 슬퍼졌을까, 자세히 보니 눈물은 나중에 그려 넣은 듯하다. 아이의 말 주머니를 보니 '할머니'를 부르고 있다. 아, 그래서 할머니가 웃으시나 보다.

연필로 슥슥 그린 무채색의 그림에 글자도 삐뚤빼뚤. 그런데 할머니만 유일하게 색이 입혀져 있는 걸 보니 그림 속에서 할머니는 특별 대우를 받으시는 듯하다. 병원 입원을 앞두고 할머니는 파마를 하셨다. 그날 아이도 머리를 멋지게 잘랐는데, 자기보다 할머니 머리를 더 공들여 그렸다. 미처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한 아이의 애정이 그림에 눅진하게 녹아들었다.

'할머니가 입원을 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일을 가시면 아이는 할머니와 지냈다. 할머니가 깨워주고 할머니 손으로 얼굴을 씻어주시고 아이 숟가락 위에 반찬을 놓아주시면 오물오물 받아먹고 자랐다. 세상에서 우리 손주가 밥 제일 잘 먹네, 칭찬도 많이 들었을 테지. 똥 눠도 할머니가 닦아주고 친구가 놀려도 할머니만 있으면 분이 풀렸다. 숙제를 안 해 선생님께 혼나도, 발 안 씻어 엄마한테 혼나도 아이는 할머니만 있으면 되었다.

아이를 학교 데려다주시는 길에 어쩌다 나와 마주치면, 할머니는 이미 굽은 허리를 더 굽혀 손이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신다. 그러곤 늘 같은 당부를 하신다.

“아이고, 우리 애가 마이 모자라지유? 슨상님이 잘 좀 가르쳐 주세유.”

그런 할머니가 쓰러지셨다. 할머니를 병원에 두고 혼자 학교 오던 날, 아이는 이 일기를 썼다. 아이에게 할머니라는 존재는 엄마와 대립하는 고부 갈등의 주역이거나 안방에서 밀려나 구석방에서 권세를 잃고 쓸쓸히 늙어가는 노인이 아니다. 아이에게 믿음직한 언덕이고 눈물의 고해성사를 받아주는 신부님이며 자라느라 힘든 마음을 목청껏 부려놓아도 한결같이 받아주는 존재다. 할머니에게 아이 또한 어떻게든 빨리 키워 황혼 육아를 벗어던지고 싶은 애물단지가 아니다. 해마다 봄을 기다려 함께 꽃을 심고 싶어지는 분신이다. 할머니와 아이는 서로의 삶에 스며들어 있다.

“선생님, 저 오늘 일찍 가야 해요.”

“왜?”

“할머니랑 심은 꽃에 물 줄라고요. 우리 할머니 병원에서 오면 꽃 보고 싶대잖아요, 글쎄.”

할머니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아이는 마당의 꽃을 돌보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발을 씻고 똥을 닦는다. 그리고 잠들기 전,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자기가 혼자 한 일을 자랑한다. 그러면 할머니는 아이고, 우리 손주가 밥도 잘 먹고 똥도 잘 닦네, 그러신다. 아이는 아침마다 내게 와 자기가 할머니에게 어떤 자랑을 했는지 들려준다. 그럼 나도 아이고, 할머니가 빨리 나으시겠네, 그런다. 그러면 아이도, 그니깐요, 라고 답한다. 아이도 나름 할머니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 같다. 자신이 조금만 아파도 두 눈에 눈물을 매달고 응원하는 손주가 있는 한, 복 받으신 할머니라는 생각이 든다.





송주현

만천초등학교 교사. <나는 1학년 담임입니다>, <착한 아이 버리기>, <초등학교 상담기록부> 저자. 33년째 아이들 가르치면서 함께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