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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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00

2024-05
#춘천은지금 #봄내를만나다
뮤지션 이단비
진심이 단비로 내리다





이 단 비

노래하는 예술인. 1982년생. 서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2001년 스무 살이 되던 해 춘천으로 이사와 23년째 거주 중. 현재 밴드 ‘아이보리 코스트’의 리더로, 예술 단체 ‘문화강대국’ 소속 단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수, 예술 강사, 배우 그리고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종합예술인.








2006년 아버지 이남이와 딸 이단비.
KBS ‘아름다운TV 여기는 강원도’ 프로그램에서 패널과 리포터로 활동하던 시절

 





1988년, 노래 ‘울고싶어라’가 대한민국 가요계를 휩쓸었다. 당시 이 노래를 부른 이남이* 는 우리나라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베이시스트였고, 이단비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8살 아이였다. 딸이 가수가 되는 걸 반대했던 아버지는 결국 무대에서 딸과 함께 노래하다 세상을 떠났고, 그 딸은 20년 넘게 가수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 4월 3일, 공연 연습이 한창인 문화강대국 연습실에서 이단비 씨를 만났다.




이 남 이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의 멤버로 데뷔해 당시 트렌디한 음악을 하는 밴드로 주목받았고, 이후 밴드 ‘사랑과 평화’를 결성해 작곡가, 가수, 베이시스트로 활약했다. 1988년에 발표한 노래 ‘울고싶어라’가 폭발적인 히트곡으로 사랑받았다. 이후 의형제를 맺은 이외수를 따라 춘천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철가방 프로젝트’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이어오다 2010년 폐암으로 세상과 작별했다.






가수가 되려던 건 아니었지만

어릴 적부터 노래하는 게 즐거웠던 이단비는 여행가는 차안에서 서너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노래하던 아이였다. 노래를 부르는 게 행복했다. 고등학생 때 합창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반대했다. ‘음악’을 업으로 삼았던 아버지기에 딸의 험한 앞길이 예상됐던 걸까. 노래하고 싶었던 단비 씨는 부모님 모르게 합창부 활동을 이어갔고, 대학생때는 ‘연적지 가요제’에서 1등을 거머쥐기도 하면서 재능을 ‘몰래’ 펼쳐갔다.


당시 단비 씨 가족은 춘천에서 노래방을 운영했는데, 이남이 씨가 밴드 ‘철가방 프로젝트’를 만들면서 멤버들이 매일 노래방에 모여 연습하던 시기였다. 단비 씨는 멤버들이 연습하는 걸 어깨 너머로 지켜보며 같이 부르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없는 하루를 틈타 노래방에서 연습 중인 멤버들과 노래 부르다가, 딱 걸리고 말았다. “음악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아버지에게 된통 혼났어요. 정 음악을 하고 싶으면 장학금을 받아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바로 1학년 1학기 전액 장학금을 타버렸죠. 아버지도 놀라셨을 거예요. ‘너 진심이구나. 알겠다’하고 허락해 주셨어요. 그때부터 철가방 프로젝트 멤버로 무대에 서게 된 거예요.”



밴드 아이보리코스트. 왼쪽부터 곽지은(드럼),이단비(보컬·키보드·기타), 김한림(기타·보컬)

 

 


연극 '라임의 왕 김삿갓' 공연 연습 중





정신을 바로잡고, 호흡을 가다듬고

단비 씨는 ‘철가방 프로젝트’ 이름으로 공연을 많이 다녔다. 인기 스타가 된 아버지 덕분에 나 같은 유명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수차례 무대에 섰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정도였지 가수가 되고 싶단 생각을 진지하게 하진 않았다. 그저 취미로 즐기다가 전공(동물자원)을 살리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다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 진지하게 진로 고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을 걸어야겠단 결심이 섰다. 이후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오디션을 봤지만 수차례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그때 깨달은 거죠. 내가 좋아하는 마음만 있고 실력을 갈고닦지 않았다는 걸요. 정신 차리고 기본기부터 다져야겠다 고 생각했어요. 춘천으로 돌아와서 매일 15시간씩 기타 연습하고 노래 연습하면서 3년을 보냈어요. 이때가 뮤지션의 마음가짐으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였어요.” 춘천에 돌아온 그는 예술단체인 ‘문화강대국’의 단원으로 들어갔다. (문화강대국은 다양한 장르의 전문예술인들이 모여 공연장르의 다양화를 위해 공연물을 창작하고 선보이는 전문예술법인이다) 문화강대국에서는 모든 단원에게 연기를 가르쳤다. 당시 문화강대국 대표는 ‘무대예술하는 사람들은 표현력이 가장 중요한데, 무대에서의 표현력은 연기를 통해 향상된다’는게 지론이었다. 그래서 문화강대국 단원이 되면 뮤지션도 기본적으로 연기를 배우고 무대에 섰다. 연극을 통해 무대에 서면서 관객과의 호흡이 자연스러워지고 변수에 대처하는 능력, 무대 장악력 등을 터 득하게 됐다. 동료들이 있었기에 단비 씨는 홀로 음악과 씨름하는 시간이 힘들긴 했지만, 외롭진 않았다. 그렇게 자신과 싸우며 음악적 성장통을 겪고 있던 사이, 아버지는 갑자기 폐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3개월 후, 먼 곳으로 가버렸다. 단비 씨는 가장이 되었다.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드리기 위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음악 활동에 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013년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밴드 아이보리 코스트 (Ivory CoaSt, 상아색 해변)를 결성했다. 구성원들의 따뜻 음악색과 단비 씨의 청량하고 딴딴한 목소리가 연상되도록 이름을 지었다. 이후 ‘아이보리 코스트’로 수천 번의 무대에 서고 수천 번의 노래를 불렀다. 





24시간이 모자른 단비 씨

워커홀릭 단비 씨를 멈추게 만든 건 악명 높은 코로나19. 공연이 연달아 취소되고 일거리가 사라지자 단비 씨는 이 시간마저 낭비하지 않았다.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까지 해버린 것. 출산 후엔 다시 음악 활동을 하기 위해 여러 공공기관의 지원사업에 서류를 냈지만 내는 족족 떨어졌다. 이 경력 단절의 경험에서 영감받아 ‘100번의 이력서’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공연이 없는 겨울 비수기엔 오감놀이 지도사, 굿볼 1급 지도사 같은 음악, 교육 관련 자격증을 따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수, 배우, 예술 강사, 엄마로서의 역할이 버거울 법도 한데, 그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지침이 없다. “제가 아버지를 보면서 배운 게 있어요. 늘 음악에 진심이 었고 무대에서 한 번도 허투루 한 적이 없어요. 무대에 올라가면 항상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모든 걸 쏟아내고 내려오셨어요. 저도 뭐든 쉽게 생각하지 않고 늘 진심을 다해 음악을 하고 싶어요.” 단비 씨의 올해 일정은 벌써 꽉 찼다. 가을엔 공연 ‘희극인 삼룡이’와 ‘라임의 왕 김삿갓’를 올리고 아이보리 코스트의 싱글 앨범도 두 곡 발매할 예정이다. 사소한 모든 순간에 도 최선을 다하는 그의 삶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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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희말라야리비아’뮤직비디오노래 

 노래 '닭튀김' 무대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