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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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99

2024-04
#최돈선의 둘레마을 이야기 #봄내를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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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술나무 아래 메주가 뜰 때



-내 어머니

나는 6년 전 어머니와 영원히 헤어졌다. 10년 전 나는 인제군 남면 소재지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어머니는 세탁기나 밥솥을 다룰 줄 몰랐다. 

젊었을 때 어머니의 된장찌개나 두부찌개는 내 친구들에게 대단한 인기였다. 지금도 친구들은 70이 넘었어도 내 어머니의 된장찌개나 두부찌개를 잊지 못한다.

그런 어머니의 솜씨는 치매가 찾아와 동행하기 시작하고부터 영원히 잊히고 말았다. 나도 늙어버린 나이로 신남으로 돌아와 어머니 대신 밥을 짓고 세탁기를 돌리고 반찬을 만들었다. 

하루의 시간은 길었다. 자주 어머니는 우셨고, 자주 어머닌 옛날의 소녀로 돌아갔다. 밤이나 낮이나 어머닌 들판을 쏘다녔고, 자주 자신이 만든 상상의 집을 찾아 헤매었다. 집에 가야 해, 어디니? 어디가 내 집인 거야….

달이 뜬 날, 어머닌 한밤중에 멀리 호수로 나갔다. 그리고 누군가를 간절히 불렀다. 아, 그 부름은 자신의 이름이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서 호수로 간 그날 밤, 검은 새 한 마리가 호수 건너 북쪽으로 날아갔다. 어머니도 외로웠고, 어머니 뒤를 따라다녔던 나도 외로웠다.





어느 날 나는 이웃동네 면장집에 초대되어 갔다. 어머니는 주무시고 계셨다. 면장집 마당에서 술판이 벌어졌고 오랜만에 나는 취했다. 나는 어머니 걱정에 걸음을 재촉했다.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길이었다. 그런데 그만 발을 헛디뎌 깊은 도랑에 추락하고 말았다. 간신히 일어나 몸을 추스른 나는, 허청허청 집으로 돌아왔다. 눈가가 찢어진 모양이었다. 볼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정신을 잃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밤중 누군가가 분주히 내 방을 드나드는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린 새벽까지 이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자 어머니가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밤새 어머닌 나를 간호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른 수건에 피가 흥건히 배어 있었다. 소독약 냄새가 났다. 내 상처 부위를 닦고 약을 바르고를 밤새도록 했나 보았다. 치매에도 불구하고 어머닌 늙은 자식을 위해 온정성을 다 기울였다는 걸 눈을 뜨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 후 어머니는 자식에 의해 요양원에 입소했다.

그리고 6년 뒤, 어머니는 매정한 자식에게 한마디 원망의 말도 꺼내지 않은 채 해탈의 강을 건너셨다.



-비술나무 아래 메주가 뜰 때

경칩이 지났으니 봄이다. 

춘천 시민이 봄내지를 받아보는 날은 춘분이 지나는 25일이다.

하지만 꽃샘추위는 늘 오게 마련이다. 움츠린 나뭇가지엔 아직 새순을 틔우지 않고 있다. 

나는 송곡대 김현희 교수와 동면 천사노인복지센터를 찾아간다. 마당 비술나무 아래 겨우내 잘 뜬 메주가 소담히 쌓여 있다. 이 메주로 올봄 간장을 뽑고 된장을 익힐 것이라 한다. 



천사노인복지센터의 된장 맛이 전국 제일이라고 임종미 원장은 엄지를 치켜세운다.

마흔여섯 분의 노인들이 계시는 복지센터는 멀리 삼악산이 건너다 보인다. 

잿빛 구름이 산마루를 엷게 덮었다. 지는 해가 햇무리를 이루어 주황빛으로 붉다.



임종미 원장은 소녀처럼 명랑하다. 

이 티 없이 맑은 소녀가 우울하고, 아프고 한숨짓고, 울고 웃는 어른들을 보살피는 것이다. 

머지않아 해탈의 강을 건너야 하는 어른들의 고독을 원장은 가슴 깊이 느낀다. 

강기슭까지 행복하게 가는 길은 아주 짧은 시간이다. 

꽃잎 뿌리듯 떠나는 저 망각의 배를 향해 무언의 손짓을 할 수밖에는 없다. 이별은 그렇게 운명처럼 온다. 

어머니.

아버지.

그동안 잘 견뎌주셔서 고마웠어요.

좋은 곳으로 잘 가세요. 

당신이 꿈꾸는 곳으로 가셔요. 행복하셔야 합니다. 

오후 다섯 시, 저녁 식사가 한창이다. 

둥근 테이블 주위로 할머니 일고여덟 분이 앉아서 저녁밥을 먹는다.

자기 힘으로는 밥조차 먹을 수 없는 분들에게 원장이나 요양사 선생님이 밥과 반찬을 떠 드린다.

자기 혼자 드실 수 있는 어른은 창가에 앉아 혼자 밥상을 마주한다.

식사 시간엔 그릇과 수저와 젓가락이 가벼이 부딪는 소리가 난다. 우물우물 음식을 씹는 어른들 표정에선 아름다운 생의 음악이 마법처럼 펼쳐지는 느낌이다. 

밥이 힘이다. 미약한 몸으로 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노인이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 삶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인가.





-오후의 스케치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흐린 주황빛 햇무리를 내다보던 할머니께 원장이 묻는다. 

네.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는 이는 아흔둘의 할머니다. 언뜻 보아 70대의 건강한 노인의 풍모다. 

전라남도 광주에서 4개월 전에 왔다고 한다. 김현희 교수가 조심스레 묻는다. 여기 괜찮으세요? 그러자 아흔

둘의 할머니가 미소로 대답한다. 그럼요, 좋아요.

묻는 말에 선선히 대답하고 넓은 유리창 너머 빈 논을 바라본다. 볏단 태우는 연기가 흐린 하늘로 푸르게 퍼진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지금 뭘 잡숫고 싶으세요? 

묻자, 무등산 수박이죠라고 대답한다.

할머니의 마음속엔 간절한 기도가 담겨 있다. 

무등산 수박처럼 둥글게 둥글게 모두 다 행복하라고.






하루에 몇 번 전화하세요?

두 번요.

전라도 말씨가 아니다. 아주 또렷한 표준어 말씨다.

저쪽에서 다홍빛 스웨터의 할머니가 원장에게로 와 휴대전화를 건넨다. 원장이 번호를 눌러 할머니에게 넘긴다. 딸과 어머니의 대화는 아주 짧다.

밥 먹었어, 응응. 그래, 그래. 알았어. 니들도 잘 있지? 

여기 괜찮아. 응? 응? 밥? 응, 먹었어. 

귀가 약간 먹은 노인은 잘 듣지 못한다. 밥… 밥, 응, 잘 있어, 그래그래…. 할머니의 목소리는 녹음기처럼 반복된다. 아마도 자식들에게 안심시키려는 눈치가 역력하다.

저쪽 할머니 방에서 한 분이 갑자기 운다. 조용히 달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쪽을 바라보던 초록 옷의 할머니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다 짐이지. 

맛의 달인인 구순의 할머니다. 천사복지센터 입소 6년째의 할머니다. 아흔의 나이에도 살림살이가 야무진 분이다. 특히 이 초록 할머니의 된장 비법은 원장과 요양사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두 칭찬하는 맛이다. 

마당 비술나무 아래 쌓여 있는 메주로, 올해도 항아리에 간장과 된장을 담글 것이다. 총사령관은 당연히 초록 할머니가 맡는다.





간장과 된장이 익어가는 어느 한적한 요양원. 

모두의 어머니와 모두의 아버지가 이 맛에 익숙해져 있다.

나는 내 어머니의 된장을 떠올린다. 그리고 문득 창밖의 하늘을 쳐다본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다. 혹시 어머니의 새는 아닐까?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저녁노을처럼 삭아가는 저녁. 

나는 지금, 손 한 번 잡아볼 수 없는 어머니의 그 보글보글한 된장 맛이 사무치게 그립다. 







최돈선 

시인. 춘천시 둘레엔 1개 읍, 9개 면이 있다.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 고요한 곳에 현자는 있을 것이다. 당산목 같은 우직한 당신의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