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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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98

2024-03
#앉아서 세계속으로 #봄내를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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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나는 방콕






“네? 예약이 안 되어있다고요?!” 

새벽 3시, 방콕의 호텔 로비에서 난 멘붕에 빠졌다. 노 부킹 정도의 영어만 들렸는데 하도 당황해서 안 그래도 짧은 영어가 마음대로 나오지 않았다. 두 달 전부터 찾아본 숙소인데 결제가 안 되어 예약이 취소된 모양이다. 게다가 지금은 남는 방도 없다고 한다. 태어나 첫 해외여행이었고 옆에는 내 예약만 믿고 함께 온 여자친구가 있었다. 말도 안 통하고 문자도 읽을 줄 모르는 낯선 땅, 어쩔 줄 모르고 사색이 되어버린 초보 여행자를 호텔 직원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켰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더니 근처 호텔을 예약하고, 택시까지 잡아준 것이다.






여행 경험이 쌓인 지금에야 별일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 당시에는 정말 두려웠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곳에서 나는 정말 연약했고, 무지했으며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모두가 호의를 베푼 것만은 아니었다. 한 택시 기사는 분명 피프틴(15)으로 이야기하고 출발했음에도 피프티(50)를 달라고 우겼다. 영어를 한마디도 안 하겠다고 마음먹은 듯했던 여자친구까지 나서 반박했지만 우리는 눈 뜨고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툭툭이(소형 삼륜차)는 여행 책자에서 꽤나 낭만적으로 보였는데 막상 타보니 거리의 매연과 소음을 그대로 뒤집어써야 했다.

날씨는 무척 덥고 습했다. 유명한 왕궁을 갔는데 수많은 사람들과 끈적이는 날씨에 진이 다 빠져버렸다. 횡단보도에는 또 신호등이 없었다. 빵빵거리는 오토바이들이 연어 떼처럼 지나가 한동안 건너지 못했다. 현지 사람들은 유유히 길을 건넜는데 우리는 고유의 질서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이런 힘들었던 기억들이 여행을 풍부하게 하고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을 안다.







공들여 세운 계획과 잔뜩 부푼 환상도 여행에서는 다소 어긋나 버리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와 문화와 질서가 다른 곳은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그런 어긋남을 바라고 여행을 떠나는 건 아닐까. 철저한 계획대로만 일정이 진행된다면 그걸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기치 못한 상황, 갑자기 만나는 인연, 기대와 다른 실재가 비로소 여행을 완성하는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수와 실망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여행기는 여행자의 실패담일 수도 있겠다. 여행과 모험을 다룬 이야기는 모두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힘겨운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의 계획과는 상관없는. 동서고 금을 막론하고 여행기가 인기 있는 건 삶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계획하지만 어긋나고, 사건과 상황이 끼어든다. 이를 헤쳐 나가는 건 어렵고 고된 일이지만 결국 자아를 성장시키고 삶을 의미 있게 한다. 

아티스트 요조는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이라는 책을 썼는데 여행이야말로 실패를 사랑하는 일일지도.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했는데 ‘인생’ 대신 ‘여행’을 넣어도 딱 맞는 말이다.


그래서 방콕은 실수와 실패만 있었냐고? 없는 게 없는 짜뚜짝 시장은 볼거리가 가득했고, 배낭여행 일번지 카오산로드에는 젊음과 자유가 넘쳐흘렀다. 투어로 떠난 암파와에서 수백 마리 반딧불을 보았다. 짜오프라야 강 유람선에서는 당시 인기 절정이던 강남스타일 말춤을 추기도 했다. 절망적인 춤 실력으로 케이팝을 기대한 외국인들에게 충격을 주긴 했지만.

 

아주 예전, 처음 보는 선배 집에서 잔 적이 있다. 해외여행 경험이 많은 그는 밤이 늦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달뜬 마음으로 첫 여행지로 어디가 좋을지 물었는데 주저 없이 방콕을 추천해 주었다. 여행은 모두에게 고유한 것이어서 방콕에서 나는 선배도 겪지 못한 실수와 실패를 연발했다. 하지만 여행을 계속할 용기를 얻었고, 예약도 제대로 못하고 덤벙거리는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던 그녀와 결국 결혼도 했다. 방콕은 내게 더없이 아름다운 희극이다.










김병현 

지구별 여행자. 삶을 벗어나는 관광이 아닌 삶을 경험하는 여행을 지향합니다.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보다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