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빌딩 숲을 조금만 벗어나면 나타나는 낮은 건물과 고즈넉한 정취, 이곳은 교토다. 포털 사이트에는 ‘일본 어디에도 교토만큼 오래되지 않았고, 교토만큼 새롭지 못하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오래되고 깨끗한 거리에 노신사 같은 중후한 신뢰가 느껴져 고개를 끄덕인다. 여행자에게는 눈길 닿는 곳마다 신기해 보이니 새롭다는 표현에도 동의가 된다.
교토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였는데 우리는 20년 전으로 돌아가 들뜬 기분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거리를 걸었다. 여행은 기분의 음표를 두 음 정도 높여놓는다. 마음은 유리잔의 물처럼 작은 진동에도 일렁이고 몸의 감각은 예민하게 반응한다. 보이는 것마다 신기하고 새롭다. 세상이 놀라운 어린아이가 된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에는 우리 모두 여행자였다. 시내버스를 타고 옆 동네에만 놀러 가도 다른 세상이지 않았나.
교토는 우리나라와 여러모로 엮여있다. 도시샤 대학에 정지용과 윤동주, 두 시인의 시비(詩碑)가 있다.
그들은 시대의 비극에 아파했으나 시는 살아남아 국민에게 애송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도요토미히데요시를 받드는 신사도 있고, 그 앞에는 ‘코무덤’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도요토미의 명으로 조선 백성들의 귀와 코를 닥치는 대로 베어갔다. 무려 12만 6천여 명의 백성이 희생되었고, 그 무도함이 이곳에 증거로 있다. 지금도 우리 민족에게는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속담이나 귀와 코를 뜻하는 한자어인 ‘이비(耳鼻)’에서 파생된 ‘에비!’라는 말에서 당시의 트라우마가 잔인하게 남아있다.
교토는 무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본의 수도였다.
바둑판처럼 동서와 남북으로 뻗은 길이 아주 예전부터 만들어진 계획도시라는 걸 알게 한다. 여전히 많은 일본인에게 교토는 정신적 수도이자 문화의 중심지이다. 고궁, 절, 신사 등 수많은 유적지가 있다.
일본의 신사는 작은 규모까지 추산하면 30만 개에 이르는데 교토에도 수천 개가 있다. 일본인들은 신화에 전해오는 다양한 신들이나 지역 고유의 토속신, 역사적 인물이나 심지어 악령까지도 위안하기 위해 신사에 모신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후시미이나리 신사로 일명 여우 신사라고도 불린다. 신사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토리이(鳥居)가 1만 개나 되는 유명한 곳이다. 숲속으로 붉은 기둥과 들보가 셀 수 없이 이어져있다.
붉고 긴 터널을 걸어 낯선 세계로 들어서면 경건해진다.
숙소로 돌아가려 근처 전철역으로 갔으나 다른 노선을 잘못 찾아갔다.
근사한 날씨에 개천 둑을 따라 걸어가기로 했다. 해가 뉘엿거리는 천변 풍경에 친구들은 연신 감탄했는데 난 아무리 봐도 석사천이 더 예쁘긴 했다. 강아지와 아이가 산책하는 평화로운 풍경, 우리는 손 흔들며 길을 걸었다. 멀리서 보면 다 큰 어른들의 신난 실루엣이 보였을게다. 친구들 모두 그 길을 걸어온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여행은 낯선 길을 걷기만 해도 각인을 선물하나 보다. 갑자기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다리 아래에서 한 청년이 관악기로 <명탐정 코난>의 배경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고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지난가을, 석사천 재즈 페스타가 떠올랐다. 환상적인 음악 소리가 산책로를 가득 채웠고 시민들이 가득 모였다.
외국 뮤지션의 수준 높은 연주를 들으며 생각했다.
여행 중 이런 축제를 우연히 만난다면 더욱 행복하겠다.
여행은 행복 지수를 몇 배씩 올려주니까. 그러다 다시 깨달았다.
여행하는 마음으로 살면 일상의 순간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겠구나.
교토 청년의 음악 소리가 우리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었듯 춘천의 산책로도 누군가에겐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순간의 소중함을 비로소 깨닫기 위해 여행하는지도 모른다.
김 병 현
지구별 여행자. 삶을 벗어나는 관광이 아닌 삶을 경험하는 여행을 지향합니다.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보다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기 위해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