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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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96

2024-01
#앉아서 세계속으로 #봄내를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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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시작, 춘천





어렸을 때부터 지도 보기를 좋아했다. 학기 초 새 교과서를 받으면 사회과부도 뒤쪽에 있는 나라 이름과 수도를 외우고, 친구와 누가 더 많이 아나 내기를 하기도 했다. 

보아의 <아틀란티스 소녀>를 들을 때면 황홀했다. ‘저 먼바다 끝엔 뭐가 있을까.’ 나도 언젠가 꼭 세계를 여행해야지. 가슴이 마구 뛰었다. 진로 희망보다 소중한 꿈이었다.


보아는 어느새 가요계 대선배가 되었다. 나도 그만큼 나이를 먹고, 취직을 하고, 일을 했다.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돈을 벌었다. 꿈은, 어디로 갔지? 


세계여행 같은 꿈을 이루려면 여러 조건이 맞아야하고,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여러 조건을 맞추어나갔고, 매일 용기를 북돋았다. 더 늦기 전에 떠나기로 했다.

1년간 평범한 시민의 세계여행기를 봄내 소식지를 빌려 전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춘천이다. 





스무살, 첫 춘천

나의 첫 춘천은 스무살이었다. 아버지는 화천의 젊은 군인이었고, 나는 지금은 사라진 춘천 어느 병원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소양강 강변에 태반을 묻었다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부모님의 밥벌이를 따라 논산으로 인천으로 이사를 다녔다. 유년의 공간을 고향이라고 한다면 나는 춘천을 고향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그러나 돌아가지 못할 강렬한 기억의 공간을 고향이라 한다면 내 고향은 춘천이다. 


스무살, 대학 면접을 보러 내린 기차역이 춘천의 첫인상이다. 옛 남춘천역은 찬 공기 사이로 스미는 군밤 냄새와 군복 입은 사내들의 담배 냄새로 기억된다. 


소중한 꿈, 세계 여행

무궁화호를 타면 청량리까지 2시간이 걸렸다. 나보다 더 오래 춘천에 살아온 이들은 4시간이 넘게 걸렸다는 비둘기호를 이야기하지만 본 적은 없다. 지금처럼 깨끗하지도 빠르지도 않지만 그 시절 춘천 가는 기차는 노래와 함께 아련하다. 




춘천에서 찬란하고 뜨거운 대학 시절을 보냈다. 대부분 지하 동아리방에서 취한 기타로 습한 노래만 불렀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살 것이다. 넘치는 에너지가 내 의지를 압도하던 스무살, 자전거를 타고 인천에서 춘천까지 여행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약속했으나 뿔뿔이 흩어져버렸고, 여름방학이 가기 전 혼자라도 무언가 해봐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개강에 맞춰 자전거로 춘천에 가기로 한 것이다. 


지금처럼 스마트폰 내비게이션도 없었다. 10만 원짜리 자전거에 춘자(춘천가는 자전거)라 이름 붙이고 국도 표지판을 보며 페달을 밟았다. 갓길을 휘청거리며 마포대교를 건넜고, 46번 경춘국도를 찾아 서울을 빠져나갔다. 자전거의 속도가 좋았다. 차를 타면 볼 수 없는 풍경을 천천히 보며 밟은 만큼 정직하게 나아갔다. 오르막은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단했으나 거기를 지나면 딱 그만큼 시원한 내리막이 나타났다. 헥헥거리며 마석고개를 넘을 무렵 오아시스처럼 나타난 북한강 줄기와 나란히 달리는 경춘선 기찻길을 잊지 못한다. 혼자 달렸지만 강물과 기차가 함께여서 외롭지 않았다. 여름이었고, 뜨거운 땀이 흘렀다. 가평 여관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아침부터 비가 왔다. 뭉그적거리다 비옷을 사 입고 다시 달렸다. 갓길은 좁았고 도로로 뻗은 관목 가지가 성가셨다. 얼굴과 몸에 부딪히며 이를 악물고 달리다 보니 거의 춘천이다. 문득 관목 가지가 마라톤 주자에게 하이파이브를 건네는 관중들 같았다. 나도 손을 뻗어 환영에 화답했다. 


한동안 의암댐을 지나 출퇴근을 했다. 스무살 내가 달렸던 길일 것이다. 로드바이크로 한나절 만에 서울을 다녀오는 지금에야 별 고생도 아닌 듯싶지만, 그 시절 내겐 새로운 세계를 항해하는 거대한 모험이었다. 여행은 그렇다. 지나면 별거 아니지만 떠나기 전엔 두렵고 떨린다. 생각해보면 삶도 그러하지 않겠나. 이제 춘천 시골 쥐가 세상 구경을 떠나기로 한다.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나도 모르지만 돌아올 곳은 안다. 





김 병 현

지구별 여행자. 삶을 벗어나는 관광이 아닌 삶을 경험하는 여행을 지향합니다.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보다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기 위해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