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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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96

2024-01
#최돈선의 둘레마을 이야기 #봄내를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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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록, 그의 후손들 이야기



지내리 429-1카페

볕 좋은 11월 어느 날 오후다.

한 사람이 지내리 ‘429-1카페’에서 내게 인사한다. 저는 선생님을 잘 압니다.

나는 커피를 앞에 놓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은 표지의 책 한 권을 열더니, 속 표지에다 내 이름을 쓰고 ‘관남재 한희민 근정’이라 쓴다. 박사논문집이다. 

‘조선 후기 춘천지역 시문학 연구’라고 되어 있다. 2023년 8월이니 문학박사 취득한 지 서너 달밖에 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429-1카페는 지내리 번지를 그대로 붙인 이름이다. 이 집 바깥주인은 연극배우이다. 독특한 콧수염이 너무나 유명해서 나는 그를 콧수염 배우라고 부른다.



농부 한희민 박사

그날 나는 한희민 박사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희민 박사는 서면 박사마을 201번째 박사이다. 서면 금산리엔 한백록 장군 묘가 있는데, 거기에 관남재란 재실이 있어서 한씨 종친들의 대소사를 주관한다. 

관남재는 해마다 한씨 종친의 시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시월이면 각처에서 청주한씨 문중의 어른들이 온다. 한승수 전 총리, 한장수 전 강원도 교육감도 청주한씨 몽계공 교위공파 후손이다. 


한희민 박사는 700여 주의 사과나무를 기르고 있으므로 농부이다. 한희민 박사는 한백록 장군의 14세 직계 후손이고 한씨 종친의 회장이어서 늘 바쁘다.

한희민 박사는 춘천지역의 족보탐구와 가계도를 찾아서 탐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발굴해낸 역사적 사료는 아주 소중하다. 춘천 향토사는 그가 평생 몸담아 탐구해야 할 연구 영역이다. 






신숭겸과 한백록

서면엔 두 이야기가 전한다.

신숭겸은 고려의 개국공신이고, 한백록은 임진왜란 때 풍전등화의 조선을 수호한 장군이다. 고려에선 신숭겸에게 장절공을, 조선에선 한백록에게 충장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신숭겸은 육군의 상징이고 한백록은 해군의 상징이다. 신숭겸과 한백록 사이엔 660여년이란 시간의 거리가 존재한다. 

신숭겸은 왕건을 구하기 위해 왕건의 옷을 입고 전사했다. 후백제 견훤이 신숭겸의 머리를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머리를 황금으로 만들어 묻었다. 그래서 무덤이 세 기인데, 두 묘가 가묘이고 한 묘가 황금머리인 진묘라고 한다. 그러나 어느 무덤이 진묘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한 까닭은 도굴을 염려해서이다.


한백록 장군은 임진왜란 때 선봉대로 참전하여 옥포해전에서 왜군을 격파한다.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승리이다. 그 후 부산 첨사로 승진한 한백록 장군은 남해 미조항에서 적의 유탄을 맞는다. 선조실록엔 한백록 장군이 심한 부상 중에도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는 아들 하나를 남겼다.

그의 늙은 노비 득충은 전사한 주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춘천 서면 금산리에다 안장했다. 지금 미조항엔 한 백록 장군의 가묘가 있고 그곳 사람들이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득충이 죽자 청주한씨 종중은 회의를 열어 득충을 한 백록 장군의 묘 앞에 묻었다.

신숭겸은 왕건에 대한 충성으로 고려의 건국을 이루었고, 한백록은 왜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수호한 충의 의 장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득충은 주인에게 충과 성을 다하여 주인을 섬겼고 그 주인과 함께 묻혔다. 

당시 처한 현실은 제가끔씩 다르나 이 세 사람은 의인으로서 충의 길을 걸었다.

올해 9월, 하얀 제복의 해군들이 한백록 장군의 묘소를 찾아왔다. 그들은 동해 신형 호위함 춘천호의 간부 승조원들이다. 제복 입은 40명의 해군 장교들은 한백록 장군 431주기를 맞아 헌다례를 올리며 거수경례를 했다. 잠수함 잡는 호위함 춘천호.

2,800톤급의 이 위풍당당한 동해의 거북선엔 한백록 장군의 얼이 깊이 스며 있다. 





사과나무와 장군봉

한희민 박사는 사과나무를 기른다. 2월부터 밑거름을 주고, 가지를 전지하고, 4월이면 사과꽃을 따준다.

칠백여 그루의 사과나무에서 열리는 붉은 사과는 이름이 장군봉이다. 장군봉은 한백록 장군을 기려 지은 봉우리의 이름이다. 그 봉우리가 바로 가까이에서 과수원을 굽어보고 있다.

한희만 박사농부가 기르는 장군봉 사과는 GAP인증을 받았다. 농산물 우수 관리제품이란 뜻이다. 좋은 농부가 만든 이 농산물은 제일 먼저 학교급식으로 나간다. 향토사학자요 고전문학 전공자인 한희민 박사는 무인의 풍모와 더불어 선비적 기질도 함께 지녔다. 그는 충장공 한백록 기념사업일도 하고 춘천 역사문화연구회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한다.

한백록 장군은 춘천의 얼입니다.

그의 말은 카랑카랑하다.

최근에 세워진 춘천 시내와 서면을 잇는 춘천대교란 이름도 <한백록대교>나 <충장공대교>라 이름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고 반문한다. 




이름 하나로도 그 이름에 정신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한희민 박사의 생각이다.

한백록 장군에게 내려진 시호 ‘충무공’은 조선조 500년 역사에서 아홉 명, ‘충장공’은 조선조 500년 역사에서 열여섯 명뿐이다.

그중 임진왜란 때 공으로 받은 ‘충장공’ 시호는 아홉 명이다.

행주대첩의 도원수 권율과 의병장 김덕령, 부산의 정발 장군, 그리고 춘천의 한백록 장군이 대표적이다. 권율과 김백령은 그들을 기리는 축제행사가 그 지역에서 해마다 열리고 있고, 부산 동구 초량동엔 정발 장군의 동상에 세워져 있다. 유일하게 춘천의 한백록 장군만 이 춘천시민의 기억에서 잊혀져 있는 듯싶다.

하지만 한백록 장군에 관한 관심이 시민들 사이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건 반가운 일이다. 학생들이 역사 탐구로 한백록 장군 묘역을 찾고 있고, 시민들도 역사의 자취를 따라가는 순례여행 코스에 한백록 장군 묘와 장군봉이 그려져 있다.

게다가 인형극 ‘득충’이 공연되기 시작했고, 향토작가 최남용의 장편소설 ‘득충의 노래’가 출간되기도 했다.






관남재에서 차를 마시며 

관남재는 을사년에 지어진 한옥이다.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해이다. 관남재는 118년 동안 한을 품은 채 한백록 장군을 지켜왔다. 오래된 집이건만 단단한 모습이 품위와 위엄이 서려 있다. 우리 겨레의 마음인 듯 깔끔하고 소박하다.

처마 밑 풍경도 ‘풀잎’이다. 난 체하지 않고 꾸미지 않아 방문하는 객을 편안케 한다. 안방과 사랑방 사이로 대청마루가 자리하고 있다. 마루 정면으로 ‘김재진 서’ 라고 쓰인 초서 현판이 눈에 띈다. 한쪽 벽엔 한희민 박사가 쓴, 만해 한용운 선사의 시가 족자로 걸려 있다. 한희민 박사가 따라준 차는 밖에서 얼었던 몸을 따뜻이 녹여준다. 장군봉 사과를 씹는 소리가 사각거린다. 남쪽 바람결이 어느새 관남재 마당까지 와 있는 것일까. 풀잎 풍경소리가 청아하다.

새파란 겨울 하늘이 장군의 수염처럼 매섭고 춥다.








최돈선

시인, 춘천시 둘레엔 1개 읍, 9개 면이 있다.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 고요한 곳에서 현지는 있을 것이다. 당신목 같은 우직한 당신의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