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사회 변화가 이뤄진 격랑의 시기에 조용한 ‘봄의 고장’ 춘천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은 1970년부터 40여 년간 토박이 언론인으로 이 고장에서 일어난 사건과 변화를 지켜본 필자가 그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숨은 일화와 뒷이야기들을 전하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춘천'하면 막국수, 우직한 강원도의 맛!
오는 2월 5일은 설날이다.
새해 새 달에 새롭게 열리는 첫날이다.
한민족 고유의 최대 명절로 정월제사가 곁들여져 있어 평소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고향을 찾게 되는 날이다. 전통사회에서는 민족 최대의 명절인 초하루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시끌벅적하게 고향 방문이 이어졌었다. 요즘도 설날 연휴에는 모든 직장과 상점들이 휴무와 철시(撤市)를 하고 명절을 즐긴다.
그러나 봄내골에서만은 전혀 다른 모습이 연출되는 곳이 있다.
새해 첫날부터 손님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북적거리고 번호표를 받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장사진을 이루는 가운데 성업을 누리는 막국수집들이다.
전국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이런 풍경은 예부터 즐겼던 4대 명절(설날, 한식, 단오, 한가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도대체 막국수가 어떤 음식이길래 명절마다 이처럼 귀한 대접을 받고 봄내골 사람들이 마냥 즐기는 음식이 되었을까?
척박한 곳에서 우직하게 자라는 메밀 어렵던 시절 추억 담긴 구황식품
원래 막국수는 산촌 농민과 화전민들이 먹던 음식이었다.
메밀가루를 반죽해 끓는 육수에 얇게 뚝~뚝~ 뜯어 넣었던 메밀수제비(뜨덕국이라고도 함)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옛날에는 통칭 ‘메밀국수’라고도 불렀다. 보리이삭이 채 여물기 전에 곡식이 떨어졌던 어려웠던 시대의 대용식이었다.
거듭되는 흉년과 기근 속에 배 속을 채울 수 있는 것을 찾다가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만들어낸 구황(救荒)식품이었던 셈이다.
메밀수제비가 변신하게 된 것은 전분(澱粉·녹 말)을 만나면서 비롯됐다. 전분을 섞어 쫀득쫀득해진 반죽을 국수틀(한자로는 면착기(麵搾機)라고 씀)에 넣어 찰진 면발을 뽑아 끓는 물에 삶아 먹으면 허 기진 배를 채워줬던 새참과 긴긴 겨울밤을 이겨낼 수 있는 야식으로 제격이었다.
그래서 흉년이 잦았던 임란 이후 조선 인조 때는 산촌 주민들에게 메밀을 기르도록 권장해 기근을 넘겼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융숭하게 대접했던 별식이요, 춘천의병 활동이 왕성했던 시대의 주식 (主食)이었다고 전해진다.
강원도 산골 어느 곳에서도 재배가 손쉬운 메밀은 춥고 척박한 곳에서 우직하게 자란다. 6월과 9월에 순백의 꽃을 피워 두 번이나 수확이 가능하다. 메밀이라는 이름은 산(山)의 옛말인 ‘뫼’와 곡식인 ‘밀’의 합성어이다. 봄메밀과 가을메밀이 자라는 기간 도 75일이면 족하다. 그러나 요즘은 기후변화로 가을메밀을 주로 쓴다.
공교롭게 영양분도 많다. 오래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그런데다 다른 곡식과 달리 착취나 수탈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속을 훑어 내는 찬 식품이라는 속설이 있었지만 오히려 속을 가라앉히고 궁합을 잘 맞추면 건강을 증진시키는 웰빙식품이 되었다.
본격적인 막국수집의 도회지 출현은 6·25동란 (1950년) 이후 시작됐다.
이전에는 주막과 잔칫집 또는 국수틀이 있는 가까운 이웃이나 친척집에서 만든 막국수를 목판에 담아 머리에 이어 나르거나 자전거로 배달해 나눠 먹었던 게 고작이었다.
6·25동란 이후에야 봄내골 대중음식점에서 막국수를 찾는 미식가들이 늘어나 음식점의 보조메뉴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그러나 1960년대 말까지 도 정작 막국수를 전문으로 만들어 파는 음식점은 고작 10개 업소(1982년 춘천시 발행 단행본 <소양의 맥> 참조)밖에 되지 않았다. 이 무렵 도내 웬만한 시·군의 유명한 막국수집은 한두 곳밖에 없었다. 막국수의 고장인 봄내골에 본격적으로 전문업소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1960년대 말부터였다.
옛날에는 장정 몇 명이 매달려야 막국수 면발을 뽑을 수 있었다.
500개 업소 달하는 막국수의 본고장 향토음식으로 관광객 입맛 사로잡아
봄내골이 막국수의 본고장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산골과 재배면적이 가장 많은 강원도의 대표성이다.
둘째, 메밀 제분(製粉)과 제면(製麵)이 가능한 전문업소가 가장 많고 기업형 업소까지 등장한 유일한 지역이다.
셋째, 많은 미식가와 애호가들이 사시사철 별미로 즐기는 유일한 고장으로 그 별미가 관광객과 미식가들의 구미를 돋우고 입맛을 끌었다.
넷째, 막국수축제와 체험박물관을 통해 막국수에 대한 애정을 어느 고장보다 선점하고 앞장서서 쏟았다.
다섯째, 전국 어디를 통틀어 보아도 막국수 애식가와 업소가 가장 많고 으뜸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춘천막국수협의회(회장 홍웅기)에 따르면 현재 전문업소가 80개소, 닭갈비나 다른 음식과 병합해 막국수를 팔고 있는 업소가 400여 개에 이르고 있어 얼추 500여 개소에 가깝다.
이제는 봄내골 인근 시·군 수도권과 전국으로 시야를 넓히면 수천 개소에 이를 정도로 폭증해 음식 산업의 한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셈이다.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온 막국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물막국수, 비빔막국수, 그리고 온 면이다.
물막국수는 동치미국물이나 꿩, 닭, 쇠고기 사골을 고아서 만든 국물에 고명을 얹어 메밀국수를 말아서 먹는다. 비빔은 온갖 제철 양념과 고명을 얹어 골고루 비벼먹는 것이다. 온면은 메밀에 밀가루를 섞어서 뽑아낸 국수를, 미리 만들어 놓은 뜨거운 장국과 육수에 말아서 훌훌 들이켜 추위를 이 는 데 좋다.
막국수는 역시 더위를 식혀주고 추위를 이겨내게 만드는 이열치열(以熱治熱)과 이한치한(以寒治寒), 양수겸장(兩手兼將)의 음식이 아닐까?
요즘은 온면을 해 먹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갈비나 불고기를 먹은 후 양념한 핏물에 메밀국수를 넣어 후식으로 끓여 먹는 모습은 요즘도 자주 볼 수 있다.
막국수와 콤비를 이루는 보조메뉴도 업소마다 다양하다.
메밀묵과 감자전, 전병, 수수부꾸미, 도토리묵, 녹두빈대떡, 감자범벅과 송편, 두부, 편육 등 각 업 소마다 나대지 않고 수더분한 메뉴가 천차만별(千 差萬別)이다.
춘천막국수축제에 참가한 관광객들이 막국수를 시식하고 있는 모습
‘분식’ 장려하던 시대 상황 맞물리고 ‘냉면’ 그리워하는 실향민 향수 달래줘
‘막국수’라는 이름은 결코 음식 자체를 ‘허투루’나 ‘마구’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예민한 메밀의 성질 때문에 ‘방금’, ‘이제 막’ 만들었다는 의미와 메밀의 겉껍질과 속메밀을 ‘마구’ 섞어서 뽑아낸 국수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매일신보 1934년 7월 13일자에 메밀의 겉껍질이 포함된 국수를 막국수(黑麵·흑면)라 불렀다고 보도).
펄펄 끓는 물에 삶아낸 국수를 건져내 깨끗하고 찬물에 세 번 이상 헹구고 빨아내야 하는 정갈한 조리 과정을 보면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하는 음식인 가를 금방 알 수 있다. 주로 강원도 화전민들이 겨울철 별미로 즐겼던 막국수가 전국구(全國區)로 영역을 넓히게 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입맛을 사로잡고 독특한 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키는 맛과 함께 시대적인 상황이 그 바탕에 깊게 깔 려 있다.
1960년대는 쌀이 모자라 분식을 장려했다. 그리고 1970년에는 화전정리(봄내지 2017년 4월호 참조)가 대대적으로 이뤄지던 시기였다. 유독 실향민 이 많은 지역이어서인지 냉면(평양과 함흥냉면)에 대한 추억과 식탐도 남달랐다.
새로운 먹거리로 라면이 출현하고 정부 차원에서 분식이 적극 장려되면서 국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져 막국수가 점차 도시로 쏟아져 나오는 기폭 제가 마련됐다.
마침 이 시기는 소양강다목적댐과 춘천댐, 의암댐 공사가 시행돼 전국에서 일꾼들이 몰려들던 시기와 맞물렸다. 타지에서 찾아온 일꾼들과 산골 주둔지에서 근무하던 군인들에게는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여기에다 봄내골을 찾은 관광객들과 MT를 즐기던 젊은 대학생들까지 넉넉한 분위기 속에서 거뜬하게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향토별미음식이라는 입소문이 퍼졌다.
앞에는 지역 표시가 꼭 수식어로 붙는 ‘춘천막국수’로 전국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특허청에 지리적 표시 증명포장 등록).
이 바람에 봄내골 골목마다 막국수집 간판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불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 1996년부터는 해마다 8월에 막국수축제(현재는 닭갈비축제와 합병)를 열어 고장의 대표 먹거리를 즐기고 세상에 널리 알리고 있다. 올해는 가까스로 5억원의 예산이 마련돼 무더운 여름을 피해 메밀꽃이 피는 6월 중에 잔치를 벌일 계획을 추진 중이다.
또 지난 2006년에는 신북읍 산천리에 부지(4,299㎡)를 마련, 30억 5,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춘천막 국수체험박물관을 세움으로써 명실공이 대표적인 막국수의 고장으로 자리잡히게 되었다.
막국수의 제 맛을 느끼기 위해 지켜야 할 룰(rule)이 있다
막국수는 결코 까탈스럽지 않다.
일본의 모리소바처럼 정형화되어 있지도, 격식을 따지는 과시적인 먹거리도 아니다.
그렇지만 소박한 산골 고향의 맛을 깊이 있게 즐기기 위해서는 몇 가지 꼭 지켜야 할 룰(rule)이 있다. 자고로 음식의 맛은 재료와 조리 과정과 함께 분위기가 좌우하기 때문이다.
우선 가위로 긴 면발을 싹둑싹둑 자르는 건 몰상식이다.
좋은 일들이 오래오래 길게길게 이어지게 해달라 는 마음에서 만든 경사스러운 음식(국수)을 뭉개버리는 행동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후딱 먹어치워서는 숨어있는 담백한 맛을 느끼기 어렵다.
똬리를 틀고 그릇에 담겨 있는 면이 고명, 양념, 육수와 골고루 섞이도록 잘 휘젓고 비벼야 한다. 젓가락을 한껏 들어올려 고운 옷을 입히듯 정성껏 국수가락을 버무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침샘이 자극돼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인다. 분사된 침은 맛깔을 더 해주고 소화에 도움을 준다. 반주(飯酒)에는 이제 막 손수 숙성시킨 ‘막걸리’가 제격이다.
막국수집마다 면발과 육수, 양념의 질감과 조리법이 모두 다르다.
그래서 먹기 전에 단골손님의 반응과 입소문을 체크해 변별력을 높인 후 어느 곳의 어떤 막국수를 먹을지 미리 고르는 것이 필수적이다. 어설프게 다른 사람이 이끄는 대로 쫓아다녀서는 자기 취향과 입맛을 즐기기 어렵다. ‘원조’나 대물림한 ‘O대 막국수’, ‘명장’이라는 간판에 무작정 끌려서도 안 된다. 동치미 국물이나 육수도 잘 숙성된 걸 제때 먹어야 한다. 동치미 국물과 양념 고명에도 업소마다 자랑 하는 저마다의 비법이 숨겨져 있다. 식초나 겨자의 자극적인 맛을 알맞게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다.
편육은 새우젓에 겨자를 섞어 찍어 먹으면 좋다. 다 먹은 그릇에 남은 양념 부스러기를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국수 삶은 뜨끈한 물을 부어 간장으로 간을 맞춰 휘휘 저은 후 한 대접 들이켜 배를 채우면 뿌듯해진다. 그래야 찬 음식이 들어간 몸을 데우고 배를 채울 수 있다. 또 ‘막국수 고수(高手)’라는 말 을 들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음식은 담는 식기스타일이 중요하다. 스뎅(스테인레스 스틸) 그릇은 양념의 모습과 향(香)은 물론 국물맛을 떨어뜨린다. 음식의 품격과 전통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기와 놋그릇이 제격이다. 하지만 편의성과 투자비가 부담스러워 제멋과 제맛을 뽐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면발에는 겉메밀과 속메밀이 있다.
겉메밀은 껍질과 속메밀을 섞어 거무티티하고 푸 석푸석해 면발이 툭툭 끊긴다. 속메밀은 하얗고 찰져 잘 끊기지 않는다. 바로 봄내골 업소들이 쓰는 면발이다. 그러므로 색깔이 검다고 무조건 ‘순메밀을 썼다’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막국수집마다 독특한 메뉴판의 음식을 이것저것 시키다 보면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물론 여러 가지를 시켜 먹으면 포만감을 얻을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구수하고 수더분한 깊은 고향의 참맛은 기대하기 어렵다.
창조의 수준 높여 막국수의 명품화 이뤄야
향토음식은 그 고장의 역사와 문화,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막국수는 모름지기 봄내골 문화의 품격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즘 ‘춘천막국수’는 전성기와 전환기를 한꺼번에 맞고 있는 격이다.
‘새로운 입맛’을 가미한 기회를 ‘전통’이라는 고정 관념이 가로막아서는 더 이상 도약하기 어렵다. 이미 장정 몇 명이 매달려야 국수틀에서 힘겹게 면발을 뽑을 수 있던 시대는 까마득한 옛 얘기가 되었다. 요즘은 반죽과 국수뽑기를 모두 기계가 대신한다. 국내 메밀 제분시장도 타산이 맞지 않아 중국산 이 판을 치고 있다.
또 지금까지 ‘서민음식이었다’는 점과 기존의 ‘가격의 굴레’가 덧씌워져서는 새로운 날갯짓을 할 수 없어진다.
1970년대 초 고작 30원이었던 막국수 한 그릇 가격도 이제 7,500원까지 치솟았고 1만원이 넘는 곳도 생겨 이제는 서민음식이라는 말도 옛말이 되었다. 마침 남북 대화를 계기로 옥류관 평양냉면이 화제로 떠오르고, 먹방을 추구하는 세태로 인해 먹거리와 음식 문화가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아 가고 있다.
21세기의 글로벌한 지구촌의 식문화는 지금까지 지녀온 관습이나 의식의 틀을 벗어날 것을 강요하고 있는 중이다.
무릇 ‘문화의 세계’는 서로 다른 것이 융합해 발전을 거듭해 왔다.
음식 문화라고 결코 예외가 아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서로 다른 음식이 자연스럽게 섞이고 융합돼 전혀 다른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쟁반막국수와 치즈메밀피자형부침, 메밀싹 고명 등 새롭고 창조적인 기획과 도전이 이미 곳곳에서 조금씩 선보이고 있다.
과연 지난 1930년대를 풍미한 향토작가 이효석의 소설 제목처럼 <메밀꽃 필 무렵>은 언제일까? 막국수의 명품화, 산업화, 세계화와 함께 보다 알찬 향토음식 페스티벌(Festival)을 가꿔 나가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고장의 관심과 창조적 의식 수준을 높여 나가야 할 때이다.
글 김길소(본지 편집위원·한국전래오락연구소장) 사진 강원일보
춘천 태생. 1970년 강원일보사에 입사해 편집국에서 강원도 전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취재했다.
편집국장, 논설주간, 상무, 전무이사를 지낸 후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위원과 부위원장으로 언론사와 피해자의 중재 역할을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