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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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95

2023-12
#최돈선의 둘레마을 이야기 #봄내를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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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마지막 날의 가을시 - 그냥 그렇게 이무상과 더불어


해맑은 가을날, 나는 여든넷의 노시인을 전화로 부른다. 이무상 시인은 산 메아리처럼 늘 겸손하게 대답한다. 얼굴 윤곽이 뚜렷한 노시인은 오래 묵은 은행나무 같다. 북방인의 툭툭 불거진 뼈마디가 어떤 힘을 느끼게도 하지만, 사람 대하는 태도는 친절하고 살갑기 그지없다. 그래서 남자들보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더 많은 것일까.



< 원로시인 이무상  >


이무상.

1980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그는 시인이 되었다. 43년을 시인으로 살았다. 이젠 춘천사람들에게 원로시인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그가 쓰는 춘천 지명시地名詩는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만큼 그가 찾지 않는 곳이란 어디에도 없다. 곳곳의 지명에 대한 유래나 풍속을 연구하며 그는 시를 쓰거나 산문을 발표한다. 그의 연구 발자취인 <소슬뫼 이야기>는 춘천 향토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의 저서 중엔 서면 박사마을의 고향 이야기가 담긴 <소나무골 이야기>가 있다. 문장 속엔 선비의 고졸함이 묵향 처럼 번진다.

이 책엔 서면 월송리와 신매리 선비들의 ‘방향회’ 이야기와 시인의 선친인 이원직 선생의 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지금 서면은 박사마을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벌써 2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그런데 박사는 이렇게나 많은데 문학하는 이는 그리 많지가 않다.

그래서 올 시월 초, 서면 출신 문인들이 서면문인회를 결성했다. 이무상 시인은 문인회장이 되었다. 앞으로 정기적으로 문인시집을 내고, 해마다 서면에서 문학 행사를 열 계획이다. 

이무상 시인은 월송리에서 태어났다.

어디쯤일까, 시인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 이무상 시인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느 한 지점을 손으로 가리킨다.

야트막한 야산 언덕이 자리한 곳에 딱 세 집이 있었다고 한다. 저쯤이죠, 저기.

그 자리엔 카페 건물이 들어섰고, 아래쪽은 가을풀들이 무성했다. 저기 보이죠? 저기에 무덤이 있었고요.

시인은 어린 시절의 여름날을 떠올렸고, 비탈진 곳에서 미끄럼을 타는 벌거숭이의 자신을 보았다.

특별한 기억은 아니었다. 하지만 희미한 기억 저쪽에서 한 벌거숭이 아이가 아주 특별하게 시인의 눈에 어른거렸을 터였다.


오늘은 한가롭게 거닐기로 한 날이다.

어디로 갈까. 아, 황금나무가 서 있는 화가의 집은 어때요? 시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 화가의 집 근처에 수필가 이대범 교수도 뵙고요. 그거 좋지요. 

그러나 이대범 수필가는 전화가 불통이었다. 우린 황금나무 집으로 갔다.

서숙희 화가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이어 신대엽 화가도 화실에서 나와 인사한다. 넓은 파초잎을 바라보며 우린 평상에 둘러앉아 서숙희 화가가 내온 차를 마신다. 올해 수확한 땅콩이 곁들여졌다.

내가 가장 아름다워하는 은행나무는 올해도 가을 햇볕과 바람에 물들어간다. 소슬하게 은행잎들이 사금빛으로 흩날린다. 녹색의 풀이 깔린 마당으로 황금 이파리가 금화처럼 수북이 쌓였다.

석양이어서 빛깔이 더욱 곱고 눈부시다.

이따금 오죽烏竹 숲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오죽 숲 터널을 지나면, 넓은 잔디밭을 거느린 신대엽 서숙희 화가 부부의 청회색 화실이 나타난다.





< 오죽터널과 화실 >


오늘은 그 터널을 그냥 빼꼼히 바라만 보련다.

그냥 은행나무 아래서 파초 이야기도 하고 뒤란에 있는 100년 살구나무 이야기도 하면서 보내고 싶다. 조금 있으면 황효창 화가 부부가 온다고 한다. 기다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기다림은 마음의 설렘이니까. 설렘은 운율이 되어 현묘한 음을 내니까.

오래 못 본 친구를 만나는 날은 가장 아름다운 날이다.


가을이면 안개가 짙어진다.

춘천의 안개가 오는 날은 서숙희의 그림이 시작되는 날이다. 그림 속엔 언제나 몽환의 집과 희미한 불빛, 소멸의 사랑과 그리움이 뽀얀 안개로 피어난다.

그 곁에선 신대엽 화가의 풍속화가 펼쳐지는데, 아주 먼 옛날일 수도 있고 아주 가까운 이웃의 모습일 수도 있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쉴 새 없이 그려질 터이다.




< 황금나무가 서있는 신대엽·서숙희 화가의 집 >



이윽고 황효창 부부가 왔다.

방금 치과에서 이를 빼고 온 황효창 화가는 한 시간 동안 솜을 물고 있어야 한다. 말없이 우린 악수를 한다.

이빨은 생을 지탱해 온 튼튼한 버팀목이다. 그 이빨 하나가 뽑힌 것이다.

우린 신숭겸묘역 앞 <홍골솔밭집>으로 간다.

닭백숙을 앞에 놓고 황효창 화가는 도사연하게 앉아만 있다. 음식을 놓고 묵언수행을 하는 스님 같다.

맑은 좁쌀술은 노랗게 잘 익었다. 모두들 가을처럼 잔을 기울인다. 주인이 손수 빚어낸 전통주는 투명한 하늘을 마시는 기분이다. 반주로 마시는 한두 잔은 심신을 쇄락케 한다.


황효창 홍부자 부부, 신대엽 서숙희 부부가 함께했지만, 이무상 시인은 혼자다. 시인의 아내는 우렁각시처럼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아내를 늘 생각한다.

아침이면 조심스럽게 아내가 다가와 문안 인사를 드리고, 시인의 지갑에다 지폐 두어 장을 넣어준다. 그는 그런 아내를 사랑하고 고마워한다. 시인은 아내의 공손함과 배려심으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가 있지 않던가.

여기 이무상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하련다. 제목은 <부부>다.


바보처럼 서로 닮아

부부가 되었나 보다

세상 그 험한 일

손잡으면

따뜻한 힘 솟아

그렇게 뛰었나 보다


햇살에 머리칼도 빛 바래고

탄력 잃은

얼굴 대하면

그래도 아늑한 고향

그,

그리움이다


바보처럼 서로 닮아

부부가 되었나 보다



이무상의 <부부>란 시는 담소淡素하여 그 향기가 은실처럼 은은하다. 이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바보 같이 살고 싶어진다. 천진과 어리석음은 얼마나 깊은 경지인가. 나이 들면 어렴풋이 그걸 느낀다. 늙으면 어린아이가 되는 모양이다. 하늘 닮은 천진한 어린아이가.

담담히 삶을 응시하는 이무상의 시엔 따스한 가을 햇볕이 앙금처럼 고여 있다.


삼악산으로 해가 지고, 날이 어둑해지자 황효창 화가 부부는 오월리로 갈 시간이 되었다. 우린 섭섭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조금 있으면 북쪽 하늘에 페가수스의 창이 열릴 것이다. 페가수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 달린 말이다.

오늘 모두, 페가수스를 타고 꿈속을 날아가는 꿈을 꾸게 될까.

네모 난 페가수스 창이 신비하게 열려 있는, 이 시월의 마지막 밤에. *




< 왼쪽부터 최돈선, 이무상, 서숙희, 신대엽 님 >









최돈선

시인, 춘천시 둘레엔 1개 읍, 9개 면이 있다.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 고요한 곳에서 현지는 있을 것이다. 당신목 같은 우직한 당신의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