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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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94

2023-11
#최돈선의 둘레마을 이야기 #봄내를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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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면사의 비밀 - 국수는 춘천의 맛이다


월송리 조면사(造麵寺)를 아십니까. 

누군가 그렇게 물어온다면 대부분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조면이라면…국수 만드는 절 말인가요? 

네, 그래요. 우리 춘천엔 그런 절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서면 월송리로 간다. 

월송리엔 삼층석탑이 아담하게 서 있다. 

민가 창고 옆에 1.5m의 삼층석탑이 아담하게 서 있다. 고려 시대의 탑으로 추정하는데, 석탑 주변 들깨밭에선 종종 기왓장이 발견된다고 한다.

사라진 조면사의 흔적이다.

춘천에서 이 월송리 깊은 곳까지 오려면 두 갈래 길이 있다. 의암댐 위 신연교를 건너 동쪽 길인 서면으로 오던가, 아니면 신매대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을 따라 들어오다 보면 월송리 입구가 보인다. 

길은 구불구불하고 좁다.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월래동과 송우리의 ‘월’과 ‘송’을 합하여 월송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월송리는 달과 소나무를 지명으로 한 은둔의 마을이란 뜻을 지닌다. 그래서 그런지 맑은 가을볕이 황금 들녘을 고요히 적신다. 


그런데 이곳에 고려 시대 옛 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듣기에 생소한 국수 만드는 절인 ‘조면사’가. 

천 년 전부터, 아니 더 먼먼 옛날부터 사찰에선 특별한 일을 담당하는 절이 있었다. 국수 만드는 절인 ‘조면사造麵寺’와 두부 만드는 절인 ‘조포사造泡寺’, 그리고 탑을 만드는 절인 ‘조탑사造塔寺’가 있었다는 기록이 문헌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런 절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린 역사를, 아주 조금의 실마리를 통해 그 먼 옛날을 상상해 보아야 한다. 


사찰 음식을 이야기할 때 승소(僧笑)란 말이 있다.

누가 ‘스님 잣죽 끓여드릴까요’라고 하면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다가, ‘스님 국수 삶아드릴까요?’라고 하면, 모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고 한다. 

그만큼 스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국수를 꼽는다. 

그래서 국수를 ‘승소’ 또는 ‘낭화’라고 부른다.

국수는 밀과 메밀로 만드는 음식이다.

밀이나 메밀은 조와 귀리처럼 특수작물이다.

밀이나 메밀로 만드는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잔치 때나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53년 6.25전쟁 이후, 구호물자인 밀가루가 미국으로부터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쌀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집집마다 주로 구호물자인 밀가루를 반죽하여 국수나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동네 고갯길이나 지방도로를 조성할 때, 마을 사람들에겐 노임의 명목으로 밀가루를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밀가루 공사로 만들어진 고개나 길들을, 405 밀가루 고개, 708 밀가루 대로라 불렀다.




< 미국원조 밀가루 포대 (출처: 부경근대사료연구소) >




< 막국수 >




강원도는 특히 메밀 재배가 많아 메밀국수를 많이 만들어 먹었다.

메밀은 산골의 척박한 돌투성이 땅에서도 잘 자라는 곡식이다. 가을밤이면 돌밭이나 산비탈이 온통 소금꽃이 피어난 듯 메밀꽃으로 환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메밀밭은 소설의 중요한 배경으로 시적 분위기를 물씬 자아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 알게 모르게 메밀향이 난다고 했다.

메밀은 전 국민에게 문학적인 미학으로 자리 잡았다. 강원도는 이효석의 소설로 메밀국수의 고장으로 거듭났다.

그중 춘천의 막국수는 6.25전쟁 후, 춘천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새로이 등장했다. 춘천, 하면 으레 막국수를 떠올리게 될 정도로 그 인기가 높다.

막 뽑아 금방 먹는 메밀국수라 하여 막국수라 이름 붙였다. 옛날 효자동 교도소 담을 끼고 도는 모퉁이에 처음 막국수 집이 문을 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사라진 소문이어서 정확히 아는 이가 없다. 

지금 춘천에서 제일 오래된 막국수집은 사창고개에 자리한 ‘실비막국수’ 집이다. 춘천 제1호점이라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다. 

역사적으로 춘천은 조면사란 절이 있을 정도이니 국수의 고장임을 가히 짐작케 한다. 그 전통의 맥이 고려 적부터 면면히 흘러와 춘천의 맛이 된 것은 아닐까. 


조면사는 큰 절인 본사(本寺)에 딸린 말사(末寺)라고 생각한다. 스님들이 직접 주변 밭을 일구어 밀과 메밀을 경작했을 것이다. 부처님께 올리는 음식 공양이나 스님들의 특식으로서 국수가 제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본사라고 추정되는 절은 강 건너 소양로2가에 있었다. 칠층석탑 주변을 파다가 그릇이 발견됨으로써 그 존재가 알려졌다. 그릇엔 ‘충원사’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충원사는 현재 남아있는 ‘춘천7층석탑’과 부근 당간지주로 하여 그 규모가 대단했음을 짐작케 한다. 전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춘천 서면은 볕이 잘 들고 땅이 넓다. 충적토인 서면 강 유역은 화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어, 흙질이 매우 부드럽고 비옥하다.

지금은 감자를 거둔 밭에, 가을배추를 심어 기른다. 질펀한 들은 온통 초록빛이다.







기원전 6세기 삼한시대부터 마을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신매리유적지가 그것을 증명한다. 짐작컨대 신매리부락은 조면사 월송리까지를 아우르지 않았나 싶다. 이곳에서 밀과 메밀이 많이 재배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것을 스님들이 수확하여 맷돌에 갈아 밀가루와 메밀가루를 만든 다음, 국수나 메밀을 소재로 한 음식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메밀가루와 반죽이 된 메밀 뭉치는 이 오미나루를 이용하여 충원사로 운반되었을 것이다. 

저 멀리 당간 깃발이 펄럭이면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충원사는 대법회를 열었을 터이다. 법회가 끝나면 스님과 신도들에게 점심으로 국수가 제공되었을 것이다. 이건 오로지 필자의 상상일 뿐이다. 

만약 어떤 분이 필자와는 전혀 다른 상상에 젖는다면, 그건 또 다른 한 페이지가 될 터이다. 역사적인 상상은, 역사적인 사실을 딛고 발현되기 마련이다. 

역사적 추리로서 맥락을 더듬어본다는 일은 매우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뭔가 아쉽다. 춘천에서 사용하는 메밀은 거의 중국에서 들여온다. 지금의 현실에선 메밀을 경작하는 농가가 없기 때문이다. 저렴한 중국산 메밀보다 국산 메밀은 그 값이 비싸서 재료로 사용할 수가 없다. 

예전에 몇 집이 국산 메밀을 고집했으나 지금은 쓰지 않는다.







서울 조계사 근처엔 ‘승소’란 이름의 메밀국수집이 있다고 들었다. 코로나로 하여 문을 닫았다고 한다. 지금쯤 문을 열었을까. 

춘천에도 그런 ‘승소’란 이름의 막국수 한 집쯤 있었으면 싶다. 

법정 스님은 살아생전에 간장메밀국수를 즐겨 드셨다고 한다. 나도 스님의 미소처럼 저절로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그런 담백하고 순수한 메밀국수 한 그릇 비우고 싶다. 


메밀 향 입가에 은은히 머무는

그런 수수한 국수


 생각만 해도 저절로 승소가 지어지는 그런 가을날이다.








최돈선

시인, 춘천시 둘레엔 1개 읍, 9개 면이 있다.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 고요한 곳에서 현지는 있을 것이다. 당신목 같은 우직한 당신의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