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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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93

2023-10
#최돈선의 둘레마을 이야기 #봄내를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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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과수원 농부의 하루


여름이 가고 성큼 가을이 왔다. 백로! 이슬이 하얗게 내린다는 절기도 지났다.

낮이면 가을볕이 따갑다. 과수원마다 과일이 달게 익어간다. 곧 추석이 다가온다. 9월 23일엔 낮과 밤이 같아지는 추분이다. 이때부터 밤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가을이 깊어져 간다는 뜻이다.

옛날 사암리는 옹기를 굽는 마을이었다. 사암리 둘레로 대룡산이 감싸고 있다. 거두리에서 사암리로 걸쳐진 이 산은 머리를 북으로 둔 거대한 용의 모습이다. 이 대룡산에서 해가 떠올라 호수 건너 삼악산으로 해가 진다. 대룡산은 원창리 고갯마루에서 이름이 바뀐다. 남으로 병풍 같은 능선이 파도처럼 일렁이는데, 봄이면 알싸한 생강나무꽃이 노랗게 지천으로 핀다. 이 산을 금병산이라 이른다. 대룡산과 금병산은 서로 이웃한 형제 사이다.



대룡산 수리봉 아래에 위치한 '준수네 복숭아' 과원으로 가는길




간판 없는 ‘준수네복숭아’ 과원은 바로 대룡산 수리봉 아래 길게 엎드려 있다. 마치 도롱뇽처럼 엎드려 있어 외지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다. 번지를 치면 네비가 다른 곳으로 안내하기 일쑤다. 좁고 가파른 언덕길을 한숨 오르면 쭉 뻗은 길이 나타난다. 긴 복숭아밭이다. 한 알 한 알 모두에 노란 봉지가 씌워져 있다.

행운의 노랑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다.


농부 송호선 씨는 새벽에 일어나 사암리 복숭아 과원으로 간다. 네 시부터 그는 빨간 자동차 붕붕이를 몰고 복숭아나무 골목 골목을 누빈다. 복숭아를 감싼 노란 봉지가 농부가 쓴 헤드라이트에 반짝인다. 마치 노랑새 무리가 조롱조롱 매달린 것 같다. 새벽부터 농부는 노란 봉투가 씌워진 복숭아를 수확한다. 복숭아는 다른 과일과 다르게 조심해야 한다. 과육이 연하기에 거칠게 다루면 상하기가 쉽다. 그렇게 4시간여를 작업하다 보면 동이 트고 해가 떠오른다.



농부의 아내 조현정 씨와 아내의 시집


작업장으로 돌아온 농부는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아내가 정성스레 싸준 반찬과 밥을 먹는다. 아주 바쁠 땐 삶은 달걀 몇 개와 김밥으로 때우기도 한다.

밥을 먹으며 농부는 아내를 생각한다.

아내는 시인이다. 그동안 두 권의 시집을 냈다. 며칠 전 아내가 낸 시집이 실레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아내는 한때 많이 아팠다. 투병 중에도 아내는 글을 썼고, 수확한 복숭아를 배달하느라 아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아내에게 농부는 조용히 마음의 편지를 띄운다.

그저 고맙소. 그리고 건강하게 글 쓰시오. 

이 말을 입 밖에 낸 적은 없다.

마음으로 간직하기만 하면 된다고 농부는 생각한다. 복숭아도, 사과도, 배도 다 마음이 있듯이.

농부는 늘 그렇게 마음으로 나무와 열매, 그리고 주변 꽃들과도 대화하는 버릇이 생겼다. 복숭아와 사과는 농부의 마음을 다 이해하는 듯싶었다.

그래서일까. 농부가 기르는 과일은 달고 맛있기로 소문이났다. 무릉도원 같은 깊숙한 곳까지, 외지 사람들은 물어물어 잘도 찾아왔다. 고마웠다. 과원을 찾아오는 그 마음 마 음을 농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복숭아 한두 상자를 사기 위해 그 먼 길을 오는 것이 아니다. 그 과원의 바람과 햇볕, 풍경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이다. 해바라기처럼 웃는 순박한 농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절로 둥근 마음이 되고 만다. 여뀌풀이나 파란 달개비꽃도 오밀조밀 모여 웃고, 흘러가는 구름도 지나다가 빙그레 웃는다. 그러면 대룡산 저 산도 마음속으로 푸른 메아리를 남기는 법이다.


오전 9시부터 선별작업에 들어간다.

5천 평의 과원에서 올해 거둔 수확은 평년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분이 한두 명뿐이다. 

평년 7~8,000박스에서 올핸 2,500박스가 빠듯하다. 병해와 폭풍우, 폭염 등 이상기후 때문이다. 완전 적자다.


모든 농사가 시기를 놓치면 그 농사는 망치고 만다. 특히 과수 농사가 가장 민감하다. 과수는 적기를 잘 알아 거두어야 한다.

농부는 수확한 복숭아 봉지를 벗기고 선별작업을 한다. 정품과 B품을 분류한 다음, 정품을 공선장으로 보낸다. 춘천 시내에서 개인적으로 주문받은 과일은 저녁에 아내가 직접 배달한다.


1989년 송호선은 강원대 근처에서 카페 ‘새들의 빈집’을 운영했다. 강원대학교 1학년이었던 조현정은 카페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새들처럼 빈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빈집은 아늑하고 편안했다. 문학을 좋아했던 조현정은 당시 <창작과 비평> 한 질을 할부로 샀다. 그 대금을 마련하느라 여름방학엔 ‘새들의 빈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런 만남으로 하여 이들은 사랑에 눈이 텄고, 교제한 지 6년이 흘러 결혼했다. 그리고 준수를 낳았다.

‘새들의 빈집’은 이제 ‘새들의 둥지’가 되에 세 식구가 살게 되었다.

송호선은 이후 여행사도 운영하다 접고, 적십자사에 취직하여 월급쟁이로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암리로 돌아왔다. 복사꽃이 환한 어느 봄날이었다.

복숭아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게, 꽃잎들 사이사이 잉잉거리는 꿀벌들에게, 송호선은 마음으로 인사했다.

이제 난 너희들과 함께 할 거야.




농부에겐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봄엔 가지 전지 작업을 하고 꽃이 피면 꽃을 따주었다. 나무마다 웃거름을 얹어주고 열릴 열매가 얼마인지를 가늠해야 했다.

나무마다 특성이 있었다. 그걸 아는 일은 오랜 경험이 필요했다. 일일이 한 그루 한 그루 나무에게 온 정성을 다했다. 

시행착오도 겪었다. 병해와 폭풍우로 낙과가 심할 때는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오랫동안 농부는 나무와 한 식구가 되었다. 준수가 훌쩍 자라 청년이 되었을 때, 시인 아내는 ‘준수네 복숭아’란 이름으로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렸다. 

판매와 배달 일은 시인의 몫이었다. 준수가 시간이 나면 일을 도왔다. 그런 중에도 시인은 시를 꾸준히 썼고, 오래 아프기도 했다. 그 아픔이 아름다운 보상으로 왔다.

조현정 시인은 2021년 첫 시집 ‘별다방 미쓰리’로 강원예술상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 두 번째 시집 ‘그대, 느린 눈으로 오시네’로 실레문학상을 수상했다.


농부는 복숭아와 사과를 거두어 그 맛과 향을 세상에 알렸다. 아내는 시인이 되어 시의 향을 세상에 알렸다. 조현정시인의 시는 문단의 평판을 받아 문학상이 주어졌다. 

농부의 무릉도원엔 사람들이 자주 찾아온다. 과수원을 찾아오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아내의 페이스북으로하여 농부의 일상이 세상에 알려진 때문일까.

복숭아처럼 향기로운 마음 마음이 농부는 더없이 고마웠다. 아내가 쓴 시 한 편은 그래서 농부의 마음을 더 숙연케 한다. 

아마 나무들이 열매 모두를 아낌없이 준, 무서리의 가을이었을 터이다. 나목이 된 나무들에게 그간 쇠약해진 몸을 추스르라며 농부는 나무의 발밑에 비료를 듬뿍 주었다.*



무서리 내린 후

복숭아나무 이마 쓸어주며 

미역 대신 감사비료 휘휘 뿌려주는 

과수밭 농부의 발 아래

개여뀌 한 무리 

꽃다발처럼 놓여 있다

- 가을의 환幻







최돈선

시인, 춘천시 둘레엔 1개 읍, 9개 면이 있다.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 고요한 곳에서 현지는 있을 것이다. 당신목 같은 우직한 당신의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