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점에서 시작한다. 자연에 속하는 어느 식물과 동물도, 유병훈 작가의 그림도 그렇다.
유병훈 작가가 하얗고 광활한 캔버스에 첫 점을 찍었을 때 밀려오는 감정은 더 이상의 작업을 잇지 못하게 한다. 그럴 때면 작가는 바둑판을 생각한다. 알파고는 바둑의 아름다움을 모를 거라던 말을 기억한다. 착수하듯 점과 점을 찍는다. 그리다가 덮어두길 반복하며 7개월이 넘어가는 작업 기간 동안, 처음 시작할 때 만들어 뒀던 물감은 가둬둔 소금물의 수분이 증발하듯 더 밀도가 높아진다. 어느새 그림도 점으로 가득 찬다. 자연에 대한 경외를 담아 점마다 시간을 가뒀다. 자연이 보이지 않더라도 느껴지는 그림으로 탄생한다.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중학교, 춘천고등학교,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및 등 대학원 졸업 이후 강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40년 넘게 재직하고 오랫동안 춘천에 살았다.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나?
대학과 군대 빼놓고는 춘천에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나의 미래에 대해 알고서 먼저 앞서가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물감값을 달라고 할 때 주시고, 영화 보고 싶다고 하면 학생이 볼 수 있는 것이냐 한번 물어보며 주시고 그런 환경을 만들어줬죠. 아버지 방에는 책이 많았고 걸어둔 그림도 있었거든요. 부모님은 그림 그리는 걸 말리시질 않았어요. 저도 한 번도 물감 산다고 하고 다른 일 하는 거짓말을 해본 적 없었어요. 한번은 외상을 해본 적 있거든요. 그땐 문구점도 없고 학교 운동장 끝에 할머니들이 좌판 장사를 했는데 사려던 크레파스 대신에 일제 물감에 반해 물끄러미 계속 만지작만지작했던 적이 있죠. 그랬더니 물감 먼저 갖고 가고 다음에 남은 돈을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집에 돌아와서 누나 형에게 많이 혼났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2학년 때에는 윌리엄 워즈워스의 ‘초원의 빛’이라는 시를 읊고는 선생님께서 교과 내용으로 그림을 그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려온 그림으로 수업하셨던 기억이 있네요. 대회에 나가 상을 타서 전교생 조회 앞에 나갈 때도 좋았고요. 무작정 미술 입시 요강을 알아보겠다고 나 홀로 서울에 가는 기차를 탄 적도 있습니다.
추상 작품으로 강원의 자연을 말한다.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강원도의 풍경은 어렸을 때부터 본 마음속의 풍경입니다. 나무, 길, 산, 해가 없어도요. 20대 후반부터 형상을 재현시키는 것과 멀어졌습니다. 30대에 강원도를 돌아다니며 스케치하다가 자연 속의 기하학의 형태, 조형을 감히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고 느꼈죠. 그때 열었던 개인전에서부터 오늘도 나는 자연의 본성에 머리 숙인
다고 말했습니다.
조선시대 작가 최북(崔北)은 산수를 그리다 확 눈을 찔러버렸다고 합니다. 그 의미는 안 보이는 풍경을 그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서양도 같습니다. 현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세잔은 파리 남부 생트 빅투아르 산의 스케치가 많습니다. 그리고 또 그리다가 결국 해체가 오죠.
작품을 관람한 주부는 ‘멋있다’, 그림을 전혀 모르는 운동선수도 ‘편안하다’는 단순한 한 마디 감성의 소리를 말하고 갑니다. 바로 그것 입니다. 화론, 사조 중요하지 않습니다. 평론가의 글을 통해서 보아도 좋지만, 직접 작품을 보면서 이 사람은 자연의 어떤 역량을 받고 작업을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접근이 좋겠어요. 이번 전시 장소와 잘 어울린다는 감상도 있었죠.
이상원 미술관은 처음 온 순간부터 만만치 않은 자연의 기운이 마음에 들었어요. 전시가 끝나도 이런 풍경을 보러 여행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강원도는 동해, 설악이 있고 춘천도 설악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삼악산이 있으니 자연의 조건이 좋죠. 낯설지 않더라도 또 다른 하나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죠.
강원대학교에서 미술대학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썼고 지금은 명예교수로 평생교육원에서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춘천에서 미술을 하려는 이들에게 전하는 말은.
학생들에겐 삼각형을 그려 많이 설명하곤 했습니다. 작가가 되기에 앞서 전문성, 역사성, 인성이 필요하다고요. 또 기초가 없으면 응용력이 흔들리니 데생력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냥 시도하라고 늘 말했어요. 누가 네게 모방이라고 말하더라도 그냥 시도하자고요. 나의 첫 경험이 시작이라고. 내 작품도 손으로 찍으며 그리다가 붓으로도 찍고 병행합니다. 물감도 아크릴과 유화 등 무엇을 쓰느냐에 따라 똑같은 점이어도 효과가 다 다르죠.
평생교육원에서 우리는 이미 생활 속에서 미술을 시작했다고 해요. 쇼핑하면서 색을 고른다던가, 날씨에 따라 옷을 입는다던가. 넥타이 하나를 고르는데도 미적 감각이 필요하죠. 방법적인 것은 배워야겠지만 이미 미술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쉬지 말자고요.
유병훈 작가는 단색화라는 형식에 갇히길 원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니 점에는 다양한 농도가 느껴진다. 점과 점의 길에는 호흡과 흐름, 신명이 있다. 무한한 상상을 이끄는 점 사이에서 관객마다 나만의 자연스러운 해석을 만든다. 숲속에 자리한 미술관에 또 다른 숲이 펼쳐져 있다. 한평생 나무를 심듯 점을 심은 수행자의 숲이다. 유병훈개인전 <숲. 바람-The Forest. The Wind-Silence> 은 8월 26일부터 11월 20일까지 휴관 없이 이상원미술관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