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싸이의 신곡 ‘셀럽(Celeb)’이 발표된 이후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가수 수지의 화려한 의상이 연일 화제를 모았다. 수지가 입었던 그린컬러 퍼프 미니드레스는 패션 브랜드 ‘랭앤루’가 디자인한 의상이었다. 맞춤 제작만 가능한 쇼피스임에도 전 세계에서 구매요청이 빗발쳤다. 최근 유명 셀럽부터 아이돌 무대 의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랭앤루’를 이끄는 이가 바로 춘천출신 변혜정 대표다. 학창시절 다이어리에 패션 기사와 이미지를 수집하던 소녀가 지금은 해외 바이어들의 러브콜을 받는 패션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변혜정 대표를 지난 16일 삼천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 랭앤루 2023 F/W 시즌 메인 의상인 보랏빛 셋업을 입은 변혜정 대표 >
변 혜 정
패션디자이너. 1982년생 춘천 출신.
이화여자대학교 패션디자인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패션꿈나무들을 위한 강의도 꾸준히 이어 나가고 있다.
2014년 ‘랭앤루’ 브랜드 런칭, 뉴욕, 홍콩, 방콕, 서울패션위크 컬렉션 참여했으며
2020년에는 K-Fashion Audition 국무총리상인 ‘금상’을 수상했다.
—
2013년 론칭한 랭앤루는 주체적으로 현대를 살아가며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는 여성을 위한 브랜드다. 랭앤루라는 이름은 동업자인 지금의 파트너와 홍콩 여행을 하던 중에 떠올렸다. 홍콩 여행 당시 그녀가 만났던 홍콩의 친구들은 아름다운 드레스와 반짝이는 액세서리로 외모를 화려하게 꾸몄다.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 등 3~4개국 언어가 오가는 것은 기본이었다. 지금껏 그녀가 만나본 어떤 여성들보다도 적극적이고 자신감이 넘쳤다. 놀라웠다. 아시아 여성에게서도 섹스 앤 더 시티의(Sex and the city)의 캐리 브래드쇼와 그 친구들 못지 않은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홍콩에서의 경험은 변 대표에게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그녀는 “오랜 시간 패션의 중심이 서구에 쏠려 있었는데 저는 향후 10년 안에 패션의 중심이 동양으로 옮겨갈 거라 생각 했다”라며 “중국 성인 ‘랭’과 ‘루’를 가져와 상상속의 뮤즈를 만들었고 그녀들의 이름으로 브랜드 이름을 지었다”라고 설명했다. 컬러풀한 색감과 독특한 실루엣으로 트렌드를 앞서가는 여성복 ‘랭앤루’는 현재 연 매출 50억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다.
2005년 이화여대 패션디자인학부를 졸업하고 대기업 디자인 본부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어요. 디자인회사였는데 창의적인 일을 한다기보다 한 부서의 일원으로 회사원처럼 일하는게 재미없더라고요. 2011년 이화여대 디자인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동기 언니와 우리가 원하는 옷을 직접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죠.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미니멀하고 단조로운 색상의 옷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컬러가 다채롭고 실루엣도 과감하게 넣어서 당당한 여성들을 위한 옷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랭앤루는 미국과 유럽, 홍콩까지 진출했어요. 예전에는 해외에 나가서 페어도 참여하고 바이어를 직접 발굴하려고 다녔어요. 하지만 요즘은 K-Fashion이 워낙 강세라 해외에서 먼저 연락이 와요. 중국이 대표적이죠. 한국시장에서 베스트아이템이 되면 중국의 큰 도매상들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불과 1주일 안에 중국시장에 카페제품이 돌기도 하고요. 유럽의 마켓도 요즘 한국브랜드 판매하는 쇼룸의 실적이 좋아요. 그래서 요즘엔 한국시장에 집중하면 해외 세일즈도 자연히 늘어납니다.
패션디자이너는 늘 한 두 시즌을 앞서 간다. 여름에는 패딩을 생산하고 겨울에는 수영복을 디자인 한다. 그녀는 “저처럼 상상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일이 무척 재밌다”고 말했다. 랭앤루가 치열한 패션계에서 10년째 꾸준히 사랑받는 브랜드로 자리 잡은 이유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TV속에서 늘 화려하고, 우아해 보이는 패션 디자이너의 삶이 어떤지 물었다. 그녀는 “결정해야 할 것이 산더미다. 원단컬러, 부자재, 라벨위치, 로고 방향 등 다양한 것들을 시뮬레이션해보고 정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며 “디자이너는 남는 재고를 씹어 먹어야 한다는 말을 선배에게 들은 적 있는데 그만큼 적중률 높은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압박도 항상 따라다닌다”고 설명했다.
< “어릴때 MTV라는 채널과 BAZZAR라는 패션잡지를 보며 패션디자이너를 꿈꿨다.
화려한 패션쇼와 모델들을 보며 나도 저런 디자이너가 되어 패션쇼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유난히 옷을 좋아했던 아이였다. 소풍 몇 주 전부터 명동을 돌며 옷을 보러 다닐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그는 중학교 때 유행했던 EnC라는 브랜드의 쫄티와 힙합 스타일의 리바이스 512 청바지를 입었던 기억을 들려주며 환하게 웃었다. 대학교 때는 서울토박이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을 보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넌 왜 이렇게 그려?’였다. 그는 “대도시 출신 친구들처럼 고급 미술교육을 받거나 학원에 다녀본 적은 없지만 덕분에 주저함 없이 그려낼 수 있었다”라며 “버티는 힘과 생명력, 끈기가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춘천에서 컸기 때문에 갖게 된 재능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녀의 패션학과 동기 중에 전공을 살려 지금까지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사람은 변 대표가 유일하다.
< 싸이의 셀럽 MV에 등장한 수지의 의상도 랭앤루 제품이다. >
학원이 별로 없고 공부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어서 오히려 춘천이라는 곳이 제게 문화적 영감을 주었던 것 같아요. 어릴때 엄마 손을 붙잡고 시립문화회관으로 인형극을 보러다녔고, 강원일보 합창단으로 어린이회관 무대에 서기도 하고, 매주 삼천동 시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다독상을 탄 적도 있어요. 기반은 부족했지만 부모님께서 열심히 데리고 다니면서 문화적 경험을 하게 해주려고 노력하신 것 같아요. 덕분에 디자이너를 꿈꿀 수 있었고 그런 면에서 춘천은 제 영감의 원천이 되는 것 같습니다.”
< 서울패션위크에서 선보인 랭앤루 쇼피스 의상들, langnlu.com (랭앤루 홈페이지) >
20살 대학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났던 그녀가 다시 춘천으로 돌아왔다. 떠날 때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치과를 운영하는 남편, 아이 등 세 식구가 됐다. 변 대표는 아이를 돌봐주는 양가 부모님 덕분에 매일 춘천과 경기도 성남 판교의 랭앤루 사옥을 오가며 하루하루 바쁜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께서 30년 넘도록 4단지닭갈비를 운영하며 저희를 열심히 키워주셨는데, 앞으로는 부모님 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고싶다”며 “지금 3대가 춘천에 모여 살게 된 것이 인생의 큰 축복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또 “춘천토박이인 제가 봄내에 소개된다니 너무 떨리고 한편으로 부끄러운데요. 춘천에 이렇게 재밌는 여자가 사는구나 하고 봐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인터뷰는 <카페 삼천동>에서 진행됐습니다.